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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짐 _ 이희라 (캘거리 문협)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는 걸터앉아 있다. 제법 많은 수가 모여드는 듯싶더니 일제히 날개를 펴고 무리를 지어 날아가 버린다. 그토록 가벼운 모습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말했다. 겨울은 만물을 성숙하게 하며 다시 깨어나게 예비하는 계절이라고. 그리하여 다시금 출발선에 겸허히 서게 만들어 준다고…….

6년 전 이민 오던 날 비행기 안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국토를 내려다보며 한국에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지는 태양 아래 천지가 온통 붉은 색이었는데 흩뿌린 듯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둡고 메마른 외딴 섬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나는 한국에서 그동안 후회 없이 잘 살아왔었던가? 가정이외에는 보름 전까지 몸담았던 18년간의 교직 생활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후회스러웠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유난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경기도 분당에 신도시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에 그곳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갔었다. 내가 근무하게 된 학교는 고급빌라와 넓은 평수의 아파트들이 있는 곳이었다. 신설학교라서 교사들의 업무도 상상을 초월했고, 한 학급에 학생수가 58명 이상인데다가 학부모들의 교육열도 만만치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간 발령으로 와서 두어 달 학생들과 지내보니 내 본연의 무기인 칭찬과 부드러움을 상실하며 위기감을 느꼈다. 쉽게 따르던 시골학교와 가난한 도시의 순박한 학생들이 그리웠다. 그때가 우리 아이들이 서너 살이었으니 나는 젊은 교사에 속했었고 교직 경험이 부족한 것도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우리 반 명단을 쭉 훑어보는데 일 년 먼저 온 동료교사가, 몇 학생을 지목하며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사진으로 미리 얼굴들을 익히고 나서 반 학생들을 만나러 교실로 가는 동안 근엄해 보이려고 얼굴을 굳게 하고 ‘누구 하나 걸려들기만 해봐라.’ 하는 마음을 가졌다.
교실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무섭지 않게 생긴 여선생이라 반갑다는 뜻이었다. 시골학교에서 학생들이 첫날 숨죽이며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앞으로 일 년이 오늘 내가 하기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으로 반장을 선출하기 전까지 임시 반장을 뽑기로 했다. 보통 임시반장이 반장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신중하게 추천하라고 미리 당부를 했다. 그런데 말이 어눌하고 지적능력이 떨어져 아이들 속에서 왕따를 당하다시피 하는 학생을, 누군가가 강력하게 추천을 하는 거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려가며 웃기 시작했다. 추천받은 학생은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추천을 한 학생을 보니 좀 전에 내가 미리 얼굴을 익혔던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그래! 바로 너다.’ 누구 하나만 걸리면 본 떼를 보이리라는 마음에 한 학생이 눈에 띈 것이다.
그 학생을 불러내서 교실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그 때부터 엉덩이와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얼른 잘못을 빌었으면 빨리 끝냈을 일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빌지를 않는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공부도 잘하여 자존심이 센 아이였던 것 같다. 중간에 멈추기도 참으로 난감해서 매질은 계속되었다. 누가 이기나 하는 전쟁터와 같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교사들의 체벌 문제가 크게 사회 문제화 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지금 같았으면 인터넷에 체벌 장면이 올라가고 교직을 떠나야만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차갑고 메마른 소리가 교실에 무겁게 퍼졌고 아이들은 실망과 원망의 눈빛을 보내왔다. 마침내 그 학생이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창가에 올라와 있는 빈 페트병들을 막대기로 치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학생들 가운데로 날아갔다. 움찔해 하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교실의 청결문제까지 강조하는 악착을 보였다.
내 교직 생활 동안 그런 체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학생은 부반장이 되었고 그 이후로 내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같이 지내고 보니 성격이 시원스럽고 다른 학생들보다 여러 면으로 성숙한 멋진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고 수업 시간에도 늘 밝은 얼굴로 응대를 해서 나는 어느새 그 사건을 잊어가고 있었다.
5월 스승의 날. 학부모가 일일 교사가 되어 특별 수업을 해주는 행사가 있게 되었다. 부반장인 그 학생의 부모님께 부탁을 하려고 집에 전화를 했더니 그 애 어머니가 받았다. 담임이라고 인사를 하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리석었던 나는 그때야 그 학생과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말한 다음 용서를 구했다. 진즉에 학생의 어머니와 통화를 했어야만 했었다. 그 어머니는 그날 아이의 다리를 보고 알았다고 말하며 괜찮다고 하는데,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싶어졌다. 종업식을 하던 날, 그 학생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인사를 했다.
그 다음 해부터인가 우리 반 학부형들에게 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와 가족 소개, 앞으로의 학급 경영 방침, 학생들 편애 안하기 약속 등등을 편지지에 직접 써서 다음 날 복사한 후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걸 받은 학생들이 모두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고 나서 바라보는 학생들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신뢰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올해도 이 학생들과 잘 지낼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이 섰다. 편지의 내용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부터 학부모들의 정성어린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석장, 넉장, 심지어는 다섯 장이 넘는 어머니들의 편지를 읽는 일로 행복했다. 아이들의 건강과 성격, 특기들을 적어 보내주고 어떤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라며 눈물어린 글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걸 전해주는 학생들의 표정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그 일은 해마다 계속되었다. 학생과 만나는 첫날 학생들에게 가까이 가려면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못난 행동을 했었던 걸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캐나다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꾸만 그 생각이 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당시 그 학생의 나이만큼 자란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그 학생이 그날 겪었을 수모와 다친 마음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아팠다. 그 일은 내 교직생활 기억전체를 흔들어 놓을 만큼 고통을 주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 부모가 한국의 교육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이민을 결정한 건 아니었을까? 옆에 앉은 남편에게 그 얘기를 꺼내며 아무리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 온 얼마 후, 한국 성당을 찾아갔다. 아이들 때문에 토요일 학생미사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 대학생들이 성당 문 앞에서 주보를 나눠주고 있었다.
가까이 갔더니 키가 크고 멋진 청년이 “선생님!”하고 불렀다. 이럴 수가! 바로 그 학생이 아닌가. 남편에게 그 학생이라고 알렸더니 남편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님! 저….” “ 알아. 너 00지?” 내가 그 학생의 이름을 잊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넓은 캐나다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더니 자기는 다 잊었노라고 했다. 중학교 2학년 어린 남학생은, 준수한 용모에 자신감 있는 표정, 눈부시게 멋진 청년이 되어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대학교 3학년이라고 했다.
그 이후 우리 아이들에게 멋진 선배 노릇을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 학생이 설사 그 일을 잊지 않았다 해도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성당에서 자주 보게 되니 언제든지 그 학생을 곁에 두고 잘해 줄 생각으로 내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년쯤 후, 성당이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부터 그 학생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바빠서 그렇겠지 생각하면서, 나 역시 이민 생활에 적응하고 남편이 하는 일을 돕느라고 그 학생을 잘 챙겨주지 못하게 되면서 연락이 다시 끊겼다.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할 만큼 잘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문득 누가 나를 용서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하는 일이 우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남이 먼저 나를 용서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어서 늘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학생이 멋지게 잘 자랐으니 이제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슬며시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니 이 모든 일이 찬란한 빛으로 발하기 시작한다.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이 넓은 세상에서 그 학생을 다시 만나 마음의 빚을 덜게 되었는가 하고.
이제 나는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따르는 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저 많은 새들이 가볍게 한순간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요즈음 토요일 성당에 나오는 대학생 한명이 그 학생과 너무도 닮았다. 닮은 그 학생을 보니 더욱 생각이 난다. 00야! 지금 어디에 있니?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만나고 싶구나.

기사 등록일: 20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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