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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믿음을 지킨 사람 –오정모 여사-
 
오정모 여사는 1903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그 후 평양 정의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마산 의신여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오정모 여사는 집사로서 문창교회에 출석하면서 학생들을 신앙적으로 잘 이끌었는데 문창교회 담임목사가 주기철 목사였다.

당시 주기철 목사는 부인과 사별하고 아들 넷과 살아가고 있었는데 33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오정모 여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주기철 목사 전 부인 안갑수 와 오정모 여사가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친한 사이였는데 안갑수가 죽기 직전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목사님이 걱정’ 이라면서 오정모 여사에게 주기철 목사와 자녀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오정모 여사는 주기철 목사와 결혼을 했다.

새어머니와 전실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다. 막내 아들 주광조 장로의 회고에 따르면 ‘둘째 형이 가장 반항적이었다’고 한다. 자녀를 낳은 적이 없는 오정모 여사는 전실 자녀들을 마치 학생들 훈육하듯 했고 더구나 주기철 목사 보살피는 일 때문에 전실 자녀들에게 살갑게 대할 수만도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1935년은 여러 가지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전쟁 준비를 하는 일본 정부의 신사참배 요구가 거세어졌다. 신사참배는 종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정책이었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국민을 정신적으로 일치단결 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민족의 양심이요, 교두보였다.

애국 시인 윤동주는 시 십자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구속되면 오정모 여사는 목사 없는 교회와 남편 없는 가정을 지켜야 했다. 백인숙 전도사와 교인들을 심방하고 찾아오는 교인들과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고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목사 대신 인도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와 관련 되 3번째 구속되었다 풀려 났을 때 오정모 여사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첫 마디가 ‘승리하셨습니까?’ 그리곤 다시 감옥에 들어가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당신이 순교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국 교회가 삽니다. 내가 있으니 어머니와 자녀들 문제는 걱정 마세요.’

1939년 12월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 파면의 의결하고 1940년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산정현 교회가 폐쇄되고 주기철 목사는 다시 구속되어 4년 형을 받았고 가족들은 목사관에서 내몰렸다.

모진 고문과 지병으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주기철 목사는 마지막이 온 것을 알고 한국인 간수를 통해 몰래 유언서를 가족에게 보냈다.
“8일 후에는 소천 할 것 같소. 생명보험 보험금 200원으로 막내 광조 공부 시키고 어머니 봉양 잘 하고…’

1944년 4월21일 오정모 여사는 마지막으로 남편 면회를 갔다. 간수 등에 업혀 나오는 주 목사는 심한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톱 발톱이 다 빠져 마치 송장처럼 보였다 한다.
그러나 오정모 여사는 모든 것을 참으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꼭 승리해야 합니다. 살아서 이곳을 나오지 못합니다.’ 형무소장은 죽음이 임박한 주 목사를 병보석으로 강제 퇴소 시킬 예정이었으나 오정모 여사는 거부했다. 그날 밤 9시 주기철 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 시신이 인도되어 교인들이 시신을 붙잡고 통곡을 할 때 오정모 여사는 말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은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되자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세워주겠다, 교회에 주기철 목사 동상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오정모 여사는 반대했다. 오로지 영광 받을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주 목사를 우상으로 만들어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정모 여사가 죽기 며칠 전 인민군 장교가 찾아와 김일성 장군이 보내서 왔다면서 적산가옥 2층집 한 채와 강서군 소재 26,000평 토지문서, 그리고 상자 가득 현금을 가져왔다. 항일투쟁에 대한 보상이었다. 오정모 여사는 받기를 거부했다.
“목사님은 항일투쟁 한 게 아닙니다. 다만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마귀를 배격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광조 장로의 회고.
“그때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울면서 대들었지요. 앞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가야 하는데 내 공부는 누가 시켜줍니까? 그 돈을 왜 돌려줍니까?’
그러나 오정모 여사는 순교자의 가족은 하나님이 책임진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제에게 받은 고통과 충격이 너무 심해서인지 오정모 여사는 유방암에 걸렸다.
유방암 수술을 한 분이 한국의 슈바이쳐로 알려진 장기려 박사로 산정현 교회 장로로 장립 된 분이다.
박사이면서도 의사로 불리기를 원했던 장기려 박사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내를 생각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순수한 사랑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분이다.
수술할 때 오정모 여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을 체험 해보겠다면서 마취 없이 수술을 하겠다 해서 장기려 박사는 어쩔 수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1947년 오정모 여사는 유방암 투병 중 새벽기도회를 보다 쓰러져 주기도문을 외우며 소천했다 한다. 오정모 여사는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 남편 주기철 목사 곁에 묻혔다.
장기려 박사 말에 의하면 오정모 여사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조금도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았고 얼굴에 평화로운 기운이 돌아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에 추가 해도 될만한 인물이라 했다.

이 글을 쓰는데 민경배 교수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와 박용규 교수의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 장로신보 를 참고 하였습니다.





기사 등록일: 200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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