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3.1절 특집) 남과 북에서 인정하는 손정도 목사 _첫번째
 
(3월1일이 삼일절 89주년입니다. 이에 따라 민족독립과 복음전파를 위해 살다 돌아가신 손정도 목사 (사진) 자료를 정리해 두 번에 걸쳐 싣습니다. 굳이 손정도 목사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손 목사가 활동 하던 시절에 다른 목사라는 자들은 신사참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근래 들어서는 기독교가 ‘개독교’ 라는 소리까지 듣는 지경이 되었지만 손정도 목사 같은 훌륭한 분도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본 내용은 정동 감리교회 자료, 한국 교회사, 김일성 회고록등을 참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_ 편집자 주)


덕수궁 돌담 길을 끼고 걷다 보면 옛 배재고등학교 자리와 이화여고 사이에 빨간색 벽돌로 지은 정동 감리교회가 있다. 1887년 아펜셀러 선교사가 세운 이 교회는 역사가 오래 된 교회로 이승만 대통령, 유관순 열사 같은 분이 정동 감리교회 출신들인데 손정도씨가 6대 목사로 시무하셨다.
1915년 4월부터 1918년 5월까지 만 3년간 시무하는 동안 교인 수는 급격히 늘어 2,283명까지 된 적도 있었다. 예배 형식도 변화 시켜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도 없애고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았다. 손정도 목사는 복음전파와 조국독립, 두 가지를 위해 일생을 사신 분으로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손 목사는 1882년 7월26일 평안남도 강서군의 유학자 집안이자 부유한 농가에서 아버지 손형준 선생 어머니 오신도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박신일 여사와 결혼하고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23세 되던 해 관리가 되는 시험을 보러 평양으로 가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를 만나 서구문화와 기독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에 영향을 받아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스스로 상투를 잘라 버리고 과거시험을 포기한 후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 목사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사당을 때려부수는 신앙의 결단을 하였다. 한학자 집안의 자손으로 사당을 때려부수는 그의 행동을 보고 어른들은 미쳤다 하고 일부 친척들은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생명의 위험을 느껴 도망을 쳤다. 손 목사의 신앙 메모에는 그날 밤 성령의 음성이 들려 ‘도망가라, 도망가라’고 했다고 적혀있다. 속옷 바람으로 집을 도망 나와 눈 덮인 산속에서 밤새 기도하다 실신한 것을 주민들이 발견했다.
문요한 목사의 추천으로 1905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고학을 하며 공부를 했는데 남편 없이 강서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부인은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평양으로 와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남편 학비를 조달하며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참고로 손 목사 부부는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는데, 장녀 진실, 차녀 성실, 장남 원일, 차남 원태, 3녀 인식이 있다. 장녀 손진실은 초대 주영공사와 터키 대사를 지낸 윤치창의 부인이고 차녀 손성실은 신국원과 결혼했다. 장남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한 해군의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차남 손원태는 생리학 박사로 미국에 거주했는데 2004년에 죽어 평양 애국열사능에 묻혔고 3녀 손인식은 이대 교수, 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YWCA 회장을 지냈다.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에 입학한 손 목사는 숭실전문을 자퇴하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협성신학당 (현재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해 목회자로서 훈련을 쌓았으며 민족운동의 성지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를 비롯해 이승만, 이동영, 이시영, 장지연, 노준, 노백린, 이갑, 최남선 등과 함께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1910년 협성신학당을 졸업하고 진남포 교회에서 첫 번째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 만주지방 순회 전도사로 파송 받았다. 당시 많은 동포들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피해 만주로 이주했기 때문에 만주 지방에 복음 전파할 필요 했다. 그의 목회활동은 곧 민족 독립이었다.
만주에서 목회 활동 중 가쯔라 암살에 연루 되 일본경찰에 체포 되 모진 고문 끝에 건강이 크게 악화 되었고 출옥 후에도 황해도 금광을 탈취해 만주에 한인 무관학교 세우고 무기를 대주기로 했다는 혐의로 체포 되 1년간 전라남도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귀양살이 중에도 주민들에게 본업인 복음전파와 독립정신 고취를 계속하였다.
진도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끝내자 감리교 연회는 목사님을 서울 동대문 교회 담임 목사로 파송하여 1년 간 시무 하다 정동 교회로 파송되 제 6대 목사로 3년간 시무하셨다. 정동교회에서 3년간 시무 당시 유관순 열사도 그 교회에 출석하여 손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목사는 ‘하나님사랑 과 나라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자주 하셨다. 유관순 열사가 외친 ‘대한독립 만세’는 그분이 뿌린 말씀의 씨앗이 자란 열매이다.

“오, 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 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여 주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소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 열사 기념비에 새겨진 유관순 열사의 기도문-

목사님은 신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자진해서 정동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였는데 1919년 감리교 연회 기록에 ‘당국의 압력으로 휴직 및 제명당한 연회원 손정도’ 라고 기록 되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일제의 사찰과 압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분은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사임 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3.1운동 후 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가 조직 되었는데 목사님께서는 3년간 의정원 의장으로써 파벌 싸움을 중재하며 독립군 무기 구입 자금 모금운동을 하였다. -2부에 계속 됩니다-

참고: 가쯔라는 일본 외상을 지낸 자로 가쯔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과 공모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할 것을 밀약함으로써 당시 암살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윤치창은 애국가를 작사한 윤치호의 동생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오촌 당숙인데 나이는 윤보선 전 대통령보다 2살 아래다. 해평 윤씨 집안은 조선 말기 대표적 명문집안으로 모두 친일파로 변절했다. 장인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맏사위는 친일파 집안이란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글 : 오충근 기자

기사 등록일: 2008-02-22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해외근로자, 내년부터 고용주 바..
  CN Analysis - 2024 예..
댓글 달린 뉴스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오일러스 플레이오프 진출에 비즈..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