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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끝나지 않은 혁명, 4.19
▣ 세상을 뒤흔든 한 장의 특종 사진

1960년 4월11일 오전,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 기자는 부두 근처 외교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3.15 선거이후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진 정국은 어수선하기는 했으나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경찰의 폭력진압 앞에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허종 기자가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다방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마산 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다. 그는 허종 기자에게 오더니 턱으로 부두쪽을 가르키며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행방불명 된 김주열이 틀림없어. 가서 취재해 봐.”라고 일러주더니 건너편 탁자에 앉았다.
허종 기자는 서둘러 다방을 나와 중앙부두로 향했다. 경찰들이 인양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신은 물에 잠겼다 떠올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권투를 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쥔 시신 왼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최루탄은 뒷 목덜미를 뚫고 나왔다. 짜릿한 흥분을 억누르며 허종 기자는 늘 갖고 다니는 독일제 레티나 A1 카메라를 꺼내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촬영을 마친 허종 기자는 단골 현상소로 달려가 현상을 마쳐 사진을 본사로 송고했다. 요즘 같으면 몇분이면 될 작업이 몇 시간이 걸렸다. 본사로 사진을 송고한 허종 기자는 다시 중앙부두로 갔다. 부두에는 어디서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는지 군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경찰을 밀어내고 “살인정권 타도하자”, “독재정권 물러나라” ,“부정선거 무효”를 외치고 있었다.
거룻배를 타고 홍합을 채취하던 어부들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시신의 주인공은 27일째 행방불명이던 김주열(당시 16세)소년의 시신이었다.
김주열 소년의 처참한 사진을 받은 부산일보 편집국에서는 때 아닌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종이니 실어야 한다”는 의견에 “비록 특종이라도 아침부터 처참한 시신의 사진을 실을 수 있냐?”는 반론이 거세었다. 부산일보는 조간이었다.
그 때만 해도 미신적 금기가 많았던 시절이라 그런 반론이 있을 수 있었다. 반론에 쇄기를 박은 것은 사장 김지태였다. “아무리 시신이 처참하다 해도 독자들은 왜 이런 일이 있어났는지 알아야 한다”면서 신문에 사진을 게재하는 것에 손을 들어주었다.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어 보겠다”면서 경영난에 봉착한 부산일보를 인수한 김지태는 부산출신 사업가로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사람으로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에게 모든 사업체와 부일장학회를 강탈 당했다.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이 부당한 일을 할 때 대항해야 할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언론을 개인의 이익추구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이비 언론인이었다면 허종 기자의 사진은 사장되었을 것이나 김지태 사장의 결단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AP통신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에 전송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소강상태에 들어간 3.15 부정선거 규탄에 다시 불을 붙여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몰락시킨 핵폭탄 같은 위력을 발휘한 사진이 되었다.
허종기자는 2008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친일형사 아라이 겐베이
김주열 소년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마산상고에 입학했다. 그는 합격증을 찾으러 마산에 왔다 우연히 3월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휩쓸려 경찰이 근접사격한 최루탄을 눈에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3.15 마산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가 물러난 저녁, 김주열 소년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마산 경찰서 교통주임이었다. 그는 마산경찰서장 손석래에게 소년의 시신 발견을 보고했다.
손석래 서장은 “적당히 처리하라”고 지시해 경비주임 박종표는 순경 한대진을 대동하고 현장에 도착, 시신을 유기하기로 결심하고 시신에 돌을 달아 마산 앞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피기도 전에 진 소년의 죽음에 하늘도 무심하지 않아 시신이 떠올라 경찰의 만행을 온 세상에 알렸다.
박종표는 혁명재판소에서 자신이 최루탄을 김주열 소년에게 근접 사격한 것과 나중에 시신을 유기한 것을 자백했다. 혁명재판소 검찰부(혁명검찰부장 박창암 대령)에서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그 후 재판에서 박종표는 최루탄 근접 발사는 부인하고 시신유기만 인정해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혁명재판소 상소 제1심판부(재판장 전유영 대령)는 12월15일 마산 발포사건 상소심 판결공판을 열고 상소를 기각 박종표(무기징역) 등 5인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시켰다.” (1961년 12월16일 동아일보)
1914년 생인 박종표는 친일 헌병출신으로 독립투사들을 체포 고문한 대표적 악질 매국노다. 일본 이름이 아라이 겐베이로서 항일 비밀결사인 “무궁화당 사건” 과 “국제 혈맹단 사건”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체포 고문한 악질 반역자가 해방 후에도 경찰에 남아 간부를 지내다 3.15 부정선거 시위 때 시위대에 발포해 동포를 사살했다는 것은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현대사다.
그 후 박종표는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감형으로 출소후 1994년 무렵까지 서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다.
▣ 3.15 부정 선거
이승만은 원래 권력욕이 대단해 임시정부 시절에도 대통령 안 시켜준다고 땡깡이나 부린 인물로 하와이에서 동포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돈을 독립운동에 써달라고 기탁하니 그 돈을 유용했고 “미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하다 신채호 선생으로 부터 “이완용 보다 더 악질 매국노” 소리를 들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어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52년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파가 되어 낙선이 유력하자 국회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어 간신히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56년 선거에서 말도 안되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중임 조항을 없애고, 3선에 도전 역시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어거지를 부려야 당선될 정도로 민심은 등을 돌렸다. 국회에서는 야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그 증거가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민주당)이다. 야당 부통령과 불편한 동거 끝에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4선은 확정되었다. 야당후보 조병옥이 신병으로 미국으로 출국, 워싱톤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선거를 며칠 앞두고 숨졌다. 그로서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었는데 문제는 부통령 이기붕이었다.
자유당 이기붕은 민주당 장면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기붕 후보를 찍기 위한 3인조 공개투표, 5인조 공개투표가 성행했고 야당표에는 미리 인주를 묻혀 무효표를 만들었다. 이기붕 후보를 찍은 대량의 투표용지가 나돌았다.
정치깡패 동원, 공무원 동원, 금품 살포 등 부정선거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총 동원된 3.15 선거에서 유권자수 보다 이기붕 후보에 투표한 투표용지가 더 많아 자유당에서는 이기붕 후보표를 79.2%, 장면 후보표를 17.5%로 만들었다.
이 명명백백한 부정선거에 야당 민주당이 반발해 투표가 끝난 3월15일 저녁 “이번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라는 이름의 강도행위”라고 선언했다.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처음 벌어진 곳이 마산으로 그날 김주열 소년이 박종표 손에 죽었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 특유의 유들유들하고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금번 폭력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면서 시위대를 공산세력으로 몰아갔다. 시위대를 용공분자로 몰아가는 정부, 여당에 맞춰 시위대 부상자, 사망자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넣어주는 용의주도함도 잊지 않았다.
요즘도 정부시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종북 운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50년 동안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건만 반대파를 빨갱이 공산당 종북으로 모는 수구파들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 끝나지 않은 혁명, 4.19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이 물러가고 내각책임제로 정치체제가 바뀌어 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유당에 못지 않은 친일정당이요, 부패정당이요, 보수정당으로써 당과 사람만 바뀐 것일 뿐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것은 정의로운 학생들과 의분에 못 이겨 동참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이나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열과 동경이 있을 뿐 새로운 국가를 세울 능력이나 비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완수할 정치세력이 없었다. 시민단체도 농민단체도 노동조합도 없었다. 한 움큼 남아있던 진보세력이 모여 대학생들과 함께 모든 이념을 초월한 민족주체세력이 모여 남북교류를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다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다. 쿠데타 군의 군화와 탱크는 민족통일도 민주주의도 모두 짓밟았다.
혁명의 주역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군사정권에 빌붙고 체제에 안주하고 변절했다. 그래도 4월의 정신은 살아있어 미국의 월남전 반전 운동에, 프랑스 68혁명에, 광주항쟁에, 6.10 항쟁에 그 정신이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기사 등록일: 20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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