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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역사 왜곡, 역사 부정
▣ 역사적 사실의 부정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 프랑스는 1차대전의 쓰라린 경험으로 독일 국경에 총 연장 750Km에 달하는 마지노 요새를 구축했다. ‘최후의 방어선’, ‘넘지 못할 방어선’의 뜻으로 쓰이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독일은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 후 프랑스 동북부 국경을 넘어 간단히 파리를 점령했다.
평화를 유지하고 프랑스 명맥을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앙리 필리프 페탱은 히틀러와 휴전조약을 맺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것이다. 프링스 의회는 국가수반 페탱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다. 페탱은 ‘일, 가족, 조국’을 구호로 내걸었다.
페탱 정부는 형식상 프랑스를 대표하는 합법정부지만 실질적으로 나치의 괴뢰정부로 프랑스 청년들은 나치 군수물자 생산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프랑스 산업시설은 나치의 전쟁물자 조달을 했다. 역설적인 것은 독일군에 체포된 레지스탕스 보다 페탱 정부에 체포된 레지스탕스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페탱은 일차대전 전쟁영웅이다.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베르탱 요새를 독일군 공격에서 지켜낸 뛰어난 군인으로 전쟁 후 원수로 진급했다. 그러나 이차대전이 끝나자 페탱은 조국 반역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페탱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조국이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고 강변했으나 사형이 언도되었다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대서양 섬에 있는 종신형 감옥 독방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죽었다.
페탱이 조국 반역자라는 사실은 각종 기록이 보여주듯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극우파들은 페탱의 일차대전 전공을 내세우고 나치와 휴전협정으로 아름다운 조국 프랑스를 전쟁의 파괴로부터 지켰다고 강변하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 한국 극우파의 역사부정

페탱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동상 세우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을 것이다. 공과를 따져볼 때 나치에 협조한 하찮은 과보다 공이 많기 때문이다. 일차대전 때 세운 혁혁한 전공과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 전쟁의 피해를 줄여 막대한 전후 복구비를 절약했고, 전쟁으로 희생되었을 프랑스 아들, 딸들의 생명을 구한 공로에 비하면 나치에 협조한 것은 정말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극우파들의 페탱 찬양은 그들끼리 온, 오프 라인에서 비공식 모임을 만들어 남 눈치 슬금슬금 보면서 하는 것이지 한국처럼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페탱을 찬양하지 못한다. 프랑스 사회 분위기는 조국 반역자를 공공연하게 찬양하지 못한다. 그것이 프랑스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한국의 많은 차이점 중 하나가 한국은 반역자인 친일파 찬양을 공공연하게,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친일청산을 주장하면 눈총 받고 빨갱이로 몰리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친일파와 그 옹호세력이 당당한 이유는 이승만과 미국의 비호로 한국 사회에 주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친일파와 그 옹호세력은 양시양비론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공과를 따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공(功)으로도 덮을 수 없는 과(過)가 있으니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배신하는 반역행위다. 자신이 속해 있는 가정, 학교, 마을,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시, 주,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는 어떤 공으로도 용서 받지 못한다. 이 평범한 진리를 프랑스는 페탱을 처벌함으로써 보여주었다.
외부에서 어떤 세력이 공동체에 침입했을 때 공동체 구성원이 외부세력에 야합해 공동체 침입에 앞장 선 것을 용인한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존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공동체를 배신 반역하는 것은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친일파와 그 옹호세력이 보수라고 자처하며 이승만 정권 군사독재정권에 기생하며 사회에 뿌리를 내려 단단한 기득권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을 재생산하며 조국분단을 빌미로 반대파를 빨갱이, 용공분자, 종북으로 몰아 건전한 보수가 발 붙일 여지도 없이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 또 다른 역사부정 5.18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1798년 7월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그 후에 일어난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 혁명도 프랑스 혁명이므로 뒤의 혁명과 구분하여1789년 혁명을 특별히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대혁명의 이념은 자유, 평등, 권리였으나 혁명이 진행되며 자유, 평등, 박애로 바뀌었는데 왕족과 귀족들이 지배하는 구시대(Ancien Regime)를 무너뜨리고,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신장에 큰 기여를 한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전세계적으로 결론이 내려진 이 세계적 사건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계층이 한국에 있으니 인터콥이라는 기독교 단체와 일부 극우파 인사들이다. 한국의 일부 극우파들은 공공연히 5.18도 부정하고 왜곡한다.
5.18은 설명이 필요 없는 동족상잔의 한국 현대사 비극이다. 이런 5.18에 대해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북한군 대대가 광주에 내려와 폭동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보는 사람마다 관점이 달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니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들과 대포 한잔 하면서 혹은 커피를 마시거나 식당에서 음식 기다리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5.18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기관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양 호도하여 시청자를 우롱하는 행위는 한국의 언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일보가 대주주인 조선TV와 동아일보가 대주주인 채널 A가 5.18 때 북한군 대대가 넘어와 광주에서 폭동을 주도했다고 방송해 물의를 빚고 있다. 나중에 사과방송 했지만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고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 5.18 때 광주에 있었던 기자들

그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5월21일에서야 광주에서 소요사태라는 제목이 보인다. 계엄하에 보도관제와 검열 때문에 계엄사령부 발표내용만 신문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를 쓸 수 없다고 해서 취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 장재열 중앙일보 기자, 김대중 조선일보 사회부장, 서청원 조선일보 기자, 뉴욕타임스 심재훈 기자 등 당시 광주에 파견되어 취재활동을 벌인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 대대 광주폭동 가담’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5.18 북한 관련설은 당시에도 있었다. 당시 북한 관련설에 대해 광주에서 직접 취재한 독일기자 게브하르트 힐셔는 이적활동을 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라 계엄군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적극적 참여한 항쟁을 북한으로부터 남파된 간첩이나 용공분자 소행으로 돌리려는 것은 사실의 왜곡일 뿐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법과 질서만 유지하면 된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힐셔 기자는 북한을 이롭게 했다면 “초기에는 매우 평화롭게 진행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야만적 행동이야말로 북한을 이롭게 한 점”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광주를 현장 취재했던 뉴욕 타임스 헨리 스톡스 기자는 “전두환이 생각하고 있는 남한의 기본적인 시각은 나무란 나무에는 모조리 북한 앞잡이가 달라붙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간첩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거나 국민들이 간첩 노이로제에 시달리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 5월 광주에는 간첩이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시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북한군 대대가 발을 들여놓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사전에 계획된 공수여단 투입

1995년부터 시작된 12.12군사반란 및 5.18사건 재판과정에서 피고들과 증인들의 발언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5월14일 공수부대 광주 출동이 결정되었다. 5월14일 광주에는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진행된 시국성토대회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시각 서울에서는 공수여단 광주투입이 논의되었다.
31사단장 정웅장군은 5월14일 전교사에서 열린 종합회의에 7공수 여단장 신우식 준장이 참석했다고 증언했다. 비상계엄은 5월17일, 밤12시를 기해 내려 육군의 중앙기동대 예비대인 공수특전단이 광주에 출동하는데 14일에 이미 여단장은 광주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판정에서 31사단장 정웅 소장(당시 31사단장)의 증언.
문: 5월14일 오후2시 전교사에서 열린 학생 가두시위 대책 종합회의에 7공수 신우식 여단장도 참석 했습니까?
답(정웅 사단장): 그렇습니다.
문: 7공수여단 광주행은 결정돼 있었습니까?
답: 5월14일 이미 결정된 것으로 압니다. 충정작전계획에 따라서 였습니다. 5월15일 오전 10시 무렵 전남대, 조선대에 2개 대대 숙영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문: 7공수 투입은 요청한 것 아닌가요?
답: 공수부대 투입은 천재지변이나 부마사태처럼 반드시 시위현장 지휘관 요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부마사태, 사북사태 두번 밖에 없었습니다. (공수여단)병력을 요청한 적은 없습니다.
계엄사는 5.17 계엄조치 이틀전인 5월15일 공수부대 2개 대대를 광주에 투입해 31사단장 지휘하에 둔다고 31사단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정웅 사단장은 5월17일 오후 2개 대대 병력 숙영을 위해 전남대, 조선대 운동장에 각 12개씩의 천막을 미리 쳤다. 또한 계엄사는 5.17 계엄조치가 발효되기도 전인 17일 오후 제7공수 여단 33대대, 35대대에 광주 이동을 명령했다. 주둔지를 밤 10시30분에 출발한 33,35대대가 전남대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 10분경이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33, 35대대는 18일 오후 2시25분 경 정웅 31사단장으로부터 “오후 4시부터 시위진압에 나서도록” 명령을 받았다.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11공수여단에는 18일 새벽 광주로 내려가도록 예비명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날 오후 3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11여단을 직접 찾아가 “지금 7공수 애들이 광주에서 (시위대에 밀려)고전하고 있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으니 임무수행을 잘하라.”고 여단장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정호용 사령관 말과는 달리 광주에 투입된 7공수가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은 이날 오후 3시50분 경이다. 시위진압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호용 사령관은 어떻게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을 알고 시위진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병력 증파를 지시한 것일까?
공수여단 증파는 계속되었다. 11공수가 진압에 나서기도 전인 19일 새벽 6시30분, 3공수여단은 육군본부로 부터 이동명령을 받는다. 가정 먼저 투입된 7공수여단이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에 11공수를 투입하고 11공수가 광주에 도착한 뒤 병력부족이나 진압상황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3공수여단을 축차투입한 것이다.
이 같은 공수여단 축차 투입은 광주에서 시위가 악화되어서가 아니라 5.17 계엄선포와 정치인 구속으로 예상되는 저항을 단숨에 제압하거나 일부러 저항을 불러 일으켜 “광주를 희생양” 삼아 권력을 쥐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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