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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호국보훈의 달, 6월
망국의 시대에 해방을 꿈꾼 선각자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을 통해 한국 최고의 씨족이란 말로 종친회 할 때 “삼한갑족 우리 아무개 씨”라고 하는데 백성들 고혈이나 쥐어짜고 출세에 급급한 가짜 양반후손들은 자칭 삼한갑족이라고 자신을 치켜 세울지 모르나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삼한갑족은 경주 이씨 백사공파 이회영 일가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이항복의 호가 백사이기에 백사공파라고 한다.
경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알평이다. 그는 6촌의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도와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 2,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경주 이씨는 무수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고려시대 이제현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이항복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훌륭한 조상을 두었거나 과거 급제자가 많아 삼한갑족이 아니라 경주 이씨 백사공파 우당 이회영 일가는 국권이 날로 기울어 가는 조선말기에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가 60명이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 조국 광복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에 삼한갑족 소리 듣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6형제 중 넷째 아들 우당 이회영 선생은 망명 전인 1909년 신민회 간부들과 회합을 가져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6형제가 처분한 재산이 40만원, 엽전 26가마라고 하는데 소 값으로 환산하면 현재 약 800억, 땅값으로 환산하면 2조원에 이른다. 망명을 해도 그 당시 양반들 사고방식으로 조상 제사 지낼 자손과 전토는 남길 법한데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면서 형제가 전 재산을 털어 1910년 12월30일 칼 바람이 휘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 용정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세웠다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초대 교장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맡았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최연소 입학생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를 거쳤다.
특히 청산리 대첩으로 유명한 서로군정서의 모태가 되었다. 이 학교는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지될 때까지 3,50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학비는 물론 숙식도 무료였다. 독립운동 하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돈 내고 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삼한갑족 경주 이씨의 전 재산은 조국광복에 고스란히 쓰여지고 이들은 굶기를 먹듯 하는 고생을 했다. 6형제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놓은 이석영 선생은 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 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자였으나 나중에 상해에서 두부 찌꺼기인 비지로 연명하다 세상을 떠났다.
-성재 이시영-
6형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 우당 이회영선생이다. 우당은 6형제 중 4남이고 바로 밑에 동생이 성재 이시영선생이다. 성재 선생은 1868년 저동에서 태어나 16세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6세에 총리대신 김홍집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외무부 조약국장 시절 을사늑약을 반대해 사직했으나 그 후 고종의 부름을 받아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를 지내다 한일합방 되던 해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붓고도 성재 선생은 아들 이규열 결혼식의 축의금도 모두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만주와 북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성재 선생은 평소 친분이 있던 원세개를 만나 한인들의 신변보호를 요청해 승낙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3.1운동 전까지 항일무력항쟁을 기도했다. 3.1운동 무렵에는 북경에서 이동녕, 조완구와 함께 국내와 연락하며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성재 선생은 형 우당 이회영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에 참가해 재정부장을 지냈다. 만성적으로 재정부족에 시달린 임시정부는 허정이 해외동포들에게 모금한 돈을 보내주어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노선차이를 보이며 파벌이 갈라질 때도 이동녕, 김구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키는 편에 섰다.
성재 선생 일가는 월급은커녕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 자금으로 쓰며 가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가난보다도 사상의 차이로 둘 째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가 삼촌인 우당 이회영을 일경에 밀고하는 비극이 생겼다.
일본 공공건물, 군사시설,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단체 흑색공포단을 만들어 활동하던 우당 이회영은 대련에 갔다 조카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 당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경 발표로는 자살했다고 하지만 목격자들 증언에 의하면 고문 받다 죽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촌을 밀고한 이규서와 그의 동료 연충렬은 아나키스트 행동대원 백정기에 의해 처단되었다.
-해방 된 조국에서-
6형제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성재 선생이 유일했다. 조국에 돌아온 성재 선생은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46년 3.1절을 전후해 정부수립을 하려고 했으나 조소앙, 김구, 조완구 와 함께 미군 사령관실에 끌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이미 미국은 꼭두각시 이승만을 내세워 친미정권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40대 장년에 조국을 떠났다 70대 중반이 되어 귀국한 성재 선생은 해방 후 혼란기에 일체 공직을 사절하고 교육사업에 힘 써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전문학관을 세웠다. 신흥전문학관은 경희 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성재 선생과 이승만-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성재 선생을 부통령에 지명해 제헌국회에서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성재 선생보다 7년 연하로 개인적으로는 성재 형님이라고 깎듯 하게 대했고 이승만에게 5분 이상 말할 수 있는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이승만은 성재 선생에게 저동 13번지 땅 2만평을 찾게 해준다고 했으나 “내가 땅 찾으려고 독립운동 한 게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노령에도 부통령 업무를 수행하던 중 6.25 동란이 일어났다. 서울 사수한다고 국민을 속인 이승만은 녹음 방송 틀어 놓고 서울을 탈출했다. 성재 선생은 뒤늦게 북한군에 서울이 함락되는 것을 알고 급히 피난을 서둘렀다. 부통령을 태운 자동차가 한강을 향할 때 공병대는 한강 인도교 폭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재 선생은 폭파 직전 헌병들의 인도로 한강 인도교를 건넜다. 부통령이 북한군에 포로가 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성재 선생은 6.25 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일 부통령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탐욕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성재 선생이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 직접 원인은 ‘국민 방위군 사건’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국민 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해 군인과 공무원이 아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을 국민 방위군에 편성하고 대한 청년회 회장 김윤근 준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공군 대공세에 밀려 국민 방위군 50만명을 대구로 이동시키는데 혹한의 추위 속에서 100일 행군에 5만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비극이 생겼다. 방위군에게 지급되어야 할 피복과 식량을 ‘대한 청년회’ 회원들인 방위군 장교들이 착복했기 때문이다.
성재 선생이 사임한다고 하자 이승만은 얼씨구나 하고 사표를 수리했다. 방위군 사건을 추궁하는 성재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재 선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53년 4월19일 세상을 떠났다.
-성재 선생 후손들-
성재 선생 아들 네 명 중 장남은 자녀 없이 죽었고 둘 째 이규열은 1952년 사망했다. 세 째, 네 째는 만주에서 어릴 때 굶어 죽었다. 둘 째 이규열과 결혼한 서차희 여사는 소아마비 걸린 딸과 함께 시아버지 묘를 돌보며 12평짜리 무허가 주택에서 살고 있다. 만주에서 결혼 할 때 축의금 전액을 임시정부에 보낸 장본인들이다. 성재 선생의 손자들은 모두 경기고, 경기여고를 졸업했으나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갔다. 장녀가 유일하게 이대 영문과를 중퇴했다. 첫 손자는 네 살 때 죽었고 둘 째 손자는 한 달에 190만원 벌고 있다. 나머지 손자 손녀들도 돈 벌이를 못하고 있어 건국 부통령의 후손 중 유일하게 돈 벌이를 하고 있다. 며느리 서차희 여사는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 136만원이 유일한 소득이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삼한갑족 경주 이씨 백사공파 후손들, 건국 부통령의 후손들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다 붓고 이렇게 살고 있다.
그래도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 이규학은 “독립운동 한 게 무슨 자랑인가? 시신도 못 돌아온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은데 조국에 뼈를 묻는 것만 해도 영광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기사 등록일: 201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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