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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캐나다 _ 기자수첩
지금부터 100년전인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여행 중 세르비아 출신 민족주의자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 되었다. 사라예보는 냉전 시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로 1973년 세계 여자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이 에리사가 주축이 된 한국 여자 탁구가 단체전에서 우승하여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도시로 현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하는 총소리가 신호가 되어 900만명이 죽는 대전쟁(Great War)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대공 부부가 죽은 한 달 뒤인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조약에 의해 주변 국가들도 하나 둘씩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것은 “동맹국 중 어느 국가가 공격 당하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그 국가를 공격하는”식의 전쟁이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동맹국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독일이 선전포고 하는 등 연쇄반응을 일으켜 35개국이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며 전쟁에서 빠진다. 영국이 참전하자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도 독일에 선전포고해 전쟁에 참가한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에 참전하자 캐나다도 참전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 전쟁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날 줄 알았지 4년이나 끌며 900만명이 죽을 줄 생각도 못했다.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연합국이나 동맹국이나 젊은이들이 전쟁의 낭만을 즐기려 징병소에 줄을 지었다. 나폴레옹 이후로 유럽에서는 전쟁다운 전쟁이 거의 없었다. 보불전쟁, 보오전쟁 정도를 제외하고는.
1차대전의 성격, 발발 원인의 규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론이 분분하나 팽창하는 제국주의와 당시에 팽배했던 민족주의가 큰 원인 중에 하나라는데 에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민족주의는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시작되어 점점 배타적인 위험한 형태로 커져 범 슬라브주의니 범 게르만 주의니 하는 잘못 된 민족주의로 발전되어 인류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때마침 불어 닥친 민족주의 열풍은 젊은이들의 참전에 부채질을 했다. 군에 지원하면 애국자, 지원 안 하면 매국노라는 흑백논리가 휩쓸었다. 캐나다도 마찬가지로 62만명이 참전해 전사자가 6만명이 넘었으니 10% 정도가 전사 한 것이다.

-1차 대전 최고의 저격수는 캐나다 출신-
저격수는 전장에서 적군 지휘관을 사살해 적의 지휘체계를 교란하거나 적의 기동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격수는 위장으로 적에게 위치를 노출 시키지 않고 목표물을 아주 먼 거리에서도 명중시키는 고독한 총잡이로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는 프랜시스 페가마가보우로 알려져 있다.
1차대전 때 캐나다 군으로 참전한 프랜시스 페가마가보우는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공식기록으로 378명의 적을 사살했다.
프랜시스는 캐나다 원주민인 오지브와족의 혈통을 이어 받은 소방대원이었다. 그는 23살 때인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다 23보병연대에 입대했다. 그가 입대한 목적은 백인들에게 고통 당해 온 오지보와족의 위상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신병훈련 과정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의 사격술은 재능을 인정받아 최전방에서 저격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가 사용한 총은 캐나다 육군의 제식 라이플인 1903년 형 로스 소총이었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했는데 프랜시스가 소속된 23보병연대 1대대는 3일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프랜시스가 저격수로서 천재적 소질을 나타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프랜시스는 참호에 몸을 감춘 채 독일 병사가 나타나면 저격을 했다. 그는 밤에도 달빛과 별빛을 이용해 마치 대낮처럼 적을 저격해 독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제ㅣ보병대대는 1917년 1차대전에서 악명 높은 페스샤당 전투에 투입되었다. 프랜시스는 총알과 포탄, 수류탄이 난무하는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적을 저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랜시스는 전쟁 영웅이 되어 귀환했으나 자신의 부족인 오지브와족 위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비참한 취급을 받는 것을 목도하고 “참전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세계 최고의 저격수는 부족의 자치독립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노력으로 1999년 오지브와족은 자치권을 승인 받았다. 자신의 부족이 좀더 존중 받기 위해 참전했던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최고의 조종사-
일차대전 최고의 조종사는 붉은 남작이란 별명을 가진 만프레드 폰 리이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다. 그는 프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브레슬아우(현재 폴란드 보로추아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업군인이 된 그는 프러시아군 기병연대 중위가 되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장교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통과의례로 특히 기병장교는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귀족청년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일차대전에 참전해 러시아 전선에도 종군했고 서부전선에도 종군했으나 기병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치 컴퓨터가 스마트폰에 밀리듯 참호전, 기관총, 독가스 탱크 등 근대무기 앞에 말 타고 달리는 기병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그는 보병으로 병과를 바꾸었다 1915년에 공군으로 전속했고, 1916년 9월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 후 제1전투비행대 대장이 되었는데, 이 비행대는 비행기를 주홍빛으로 장식했기 대문에 '리히트호펜의 나르는 곡마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활약상으로 볼 때 그의 계급은 최소 중령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가 소령으로 퇴역했기 때문에 대위 이상 진급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그가 격추 시킨 적기는 80대로 영국은 연구를 통해 73대 격추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비공식 합계로 그가 격추시킨 적기는 100대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기록은 독일이 전쟁에서 밀리던 1916년 이후의 기록이니 그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일차대전 당시 공군력은 연합국이고 동맹국이고 간에 정말 형편없어 전쟁 초기에는 비행기에 기관포 등 기본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아 비행 중 적기를 만나면 권총을 뽑아 쏠 정도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장비도 개선되어 기관포를 탑재했으나 공중전에서 적기를 격추 시키는 것은 100% 조종사 능력으로 열 추적장치니 광학 조준기 따위의 첨단기기는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다.
그는 삼엽기(三葉機)인 빨간색 포커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누벼 붉은 남작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의 마지막 출격은 1918년 4월21일로 프랑스 아미앵 근처에서 격추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에이스라는 칭호를 넘어 적군 아군을 막론하고 유럽 전역의 우상이었다,
-잊혀진 조종사 로이 브라운-
리히트호펜의 시신은 프랑스에 묻혀 있다 전쟁이 끝나고 7년 후인 1925년 독일로 인도 되었다. 그의 시신이 인도 되던 날 전국에는 조기가 걸리고 그의 장례식은 국장 이상으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베를린 군인묘지에 그의 시신이 묻힐 때 첫 삽을 뜬 것은 힌덴브르크 대통령이었다.
리히트호펜이 워낙 유명한 전쟁 영웅이라 누가 그를 격추 시켰느냐는 무수한 화제를 낳아 서로 격추 시켰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붉은 남작’의 명성은 자꾸 올라만 갔다. 영국군에서는 최종적으로 리히트호펜은 영국 공군 소속인 캐나다의 로이 브라운 대위에게 격추당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로이 브라운(1893-1944)의 생애는 스트레스로 점철되었다. 그가 격추한 적기는 고작 10대에 불과해 사람들은 정말 로이 브라운이 ‘붉은 남작’을 격추 시켰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내가 ‘붉은 남작’을 격추 시켰다”고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이 그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더구나 그 후 연구 발표된 바로는 ‘붉은 남작’은 대공포화에 의해 격추 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대공포탄이 아래에서 위로 관통되었기 때문이다. 이래 저래 로이 브라운은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붉은 남작’ 때문에 스트레스 속에서 살던 로이 브라운은 리히트호펜의 장례식이 엄청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죽어서 전설이 되었지만 나는 살아서 잊혀졌다”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일차대전 그 후-
일차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인류는 900만이 죽고 2,000만명이 부상당하고 800만명이 실종되는 엄청난 재앙을 겪고 30년도 안되어 또 다른 재앙을 만들었다. 지금도 지구상 여기저기서 죽고 죽이는 크고 작은 전쟁은 이어지고 있다.
독일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썼으나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은 것은 아니다. 일차대전 결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만 터키 제국도 해체되었다. 그 결과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유럽과 중동에 수많은 독립국이 생겼다.
정치적 변화 이외 일차대전은 여성의 사회참여와 지위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현저하게 늘어나자 생리대가 발명된 것도 이때로 전쟁이란 혁명적 변화가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는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일차대전 공식적인 마지막 희생자는 캐나다군 소속의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로 종전 2분을 남기고 독일군 저격수 총에 맞아 전사했다. 마치 폴 바우어가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꽃을 따다 저격수 총에 맞아 죽는 것처럼.
일차대전 종전일은 1918년 11월11일로 연합국들은 11월11일을 종전기념일(remembrance day)로 지킨다. (오충근 기자)

기사 등록일: 201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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