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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알리는 스템피드(Stempede)와 K-Day _ 기자수첩
여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하지부터다. 하지는 6월21일로 태양 황경이 90도가 되는 날인데 이 때부터 북반구의 땅 표면은 태양으로부터 열을 많이 받아 더워지기 시작한다. 일년의 절반 정도를 눈 속에서 사는 캐나다 사람들의 생활도 여름이 되면 달라져 어수선하고 무언가 신 날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 속에 들뜬 축제 분위기가 된다.
캐나다에는 특별히 휴가기간이란 것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름에 되면 시간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휴가를 많이 떠난다. 학생들은 두 달이 약간 넘는 기나 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대학생들 방학은 더 길어 모두들 summer job을 찾아 떠나고 대학가는 텅 빈다.
텅 비는 곳은 교회도 마찬가지로 여름 동안에는 예배를 안 보던가 예배를 줄인다. 믿음이 돈독한 한인교회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변함없이 정해진 예배를 드리지만. 마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주민들이 성지순례를 떠나지만 황무지의 주민들은 쾌락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생명을 대어주듯 힘 겨운 겨울을 지낸 캐나다 주민들에게 여름은 휴가의 계절이자 축제의 계절이다. 여름을 알리는 축제의 시작은 캘거리 스템피드(Stempede)와 에드몬톤 K-day가 있다. 축제 규모는 캘거리 스템피드가 비교도 안되게 크지만 축제의 기원을 따지자면 7년 먼저 태어난 K-day가 형님이다.
-K day 축제-
K-day의 시작은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E.A.S(Edmonton Agricultural Society)가 결성되어 첫 번째 농산물 전시회를 10월15일 연 것이 K-day의 효시가 되었다. 그 때는 앨버타 주가 없었고 (앨버타 주는 1905년 형성되어 연방에 가입했다) N.W.T.(North West Territory)로 알려졌다.
가을에 열리던 전시회가 1893년부터 봄에 열리기 시작했다. 장소는 로스데일 평야(Rossdale)로 현재 텔러스(Telus) 야구장이 있는 곳이다. 1903년 처음으로 행사에 시가행진(Parade)이 시작 되었다. 1904년에는 입장객이 2만명이 넘었다. 첫날 입장객이 5,200명을기록했다. Fort Edmonton에서 열리던 행사가 1910년부터 Northland로 장소를 옮겼다. 그 동안 이름이 몇 번 바뀌었지만 장소만은 변함없이 Northland에서 열린다.
세계적 대 사건인 1차대전(The Great War) 혼란기에도 이벤트는 계속되었다. 이벤트에 모인 장비와 물자는 캐나다 군에게 헌납되었다. 2차대전 때도 마찬가지로 모든 물자와 장비는 캐나다 군에 인도 되었다.
-클론다이크(Klondike) 이름으로-
이벤트 이름이 클론다이크로 정해진 것은 1962년이었다. 이 이름은 1897년 유콘 클론다이크 강에서 시작된 골드러시와 연관된 이름이다. 샌프란시스코 골드러시가 끝날 무렵인 1897년 캐나다 유콘 클론다이크 강에서 금맥이 터졌다는 소식이 퍼졌다. 1897-1898년 사이에 10만명이 몰려들었다. 금을 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다. 클론다이크 레이디로 불리는 무희, 창녀를 비롯해 도박사, 술집, 생필품 공급업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시애틀에서 증기선에 몸을 싣고 알라스카로 향했다. 시애틀 인구가 급증한 것도 이때로 3,500명 인구가 10년 사이에 42,0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알라스카 스캐그웨이에서 내려 Chilkoot Pass, White Pass(Dead horse trail)를 지나 클론다이크 강으로 향했다.
육로로 출발한 사람들은 에드몬톤이 집결 지였다. 지금 103 스트리트-화이트 에비뉴 바로 아래 있는 스트라스코나(Strathcona)역에서 그들은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 당시 스트라스코나 역은 북미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Klondiker들의 애환이 담긴 스트라스코나 기차역은 Iron horse라는 식당, 술집으로 변했다.
10만명이 몰려 갔으나 금을 구경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일부였다. 그 일부 중에서 돈 번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에드몬톤에는 그 극소수의 Klondiker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류들이 있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살인적인 추위를 이기고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 돌아온 Klondiker들의 돈은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드리듯 빨려 들어 갔다.
정작 돈을 번 사람들은 식품, 의류 등 생필품 공급업자들이었고 술 장사, 여자 장사, 도박사들도 한몫 단단히 챙겼다. 돈을 벌었던 못 벌었던 많은 사람들이 현지에 주저앉아 살길을 찾았다. 이들이 북미 서부의 초기 이주자들로 그렇게 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캐피탈 X(Capital X)-
2006년 Klondike Exhibition은 캐피탈 X로 명칭이 바뀌었다. 우연의 일치랄까? 명칭이 바뀌자 전년도 80만명을 웃돌던 입장객이 68만명으로 급감했다. 캐피탈 X라는 명칭은 에드몬톤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없었다.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80% 응답자가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시민들은 Klondike 혹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명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K-Day-
참석자들의 투표로 2012년 이 유서깊은 여름축제의 이름은 K-day로 낙착되었다. K는 물론 Klondike의 이니셜이다. 전통적으로 Klondike Exhibition은 캘거리 스템피드 끝나고 5일 후에 시작된다. 2009년에는 예외적으로 4일 후 시작되었다. 시가행진이 있는 첫째날에는 처칠 광장에서 주 수상과 함께 팬 케이크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도 오래 된 전통이다.
-캘거리 스템피드(Stempede)-
스템피드는 앨버타에서 고유명사로 더 많이 쓰이지만 원래 뜻은 천둥이나 번개, 총 소리 기타 외부 충격으로 짐승 떼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분명한 목적이나 방향없이 달리는 것을 말한다.
스템피드 역시 시작은 농부들 목장주들이었다. 동부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지독한 추위와 싸우며 황무지를 개간해 밀밭 유채밭을 일구고 목장을 세워 목장주가 되고 농부가 되었다. 황량한 땅에서 흙과 싸워온 이들에게 재미를 붙여 줄 것이 여층거리가 필요한 것 아닌가?
1884년 세워진 C.D.A.S.(Calgary and District Agricultural Society)는 1886년 첫번째 농산물 전시회를 열었다. 몇 번 열리던 전시회는 흉작, 불경기, 기상관계로 중단되었다 1899년 Western Pacific Exhibition Company 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스템피드는 규모가 커졌다. 1908년 연방정부는 캘거리가 도미니언 전시회를 주최한다고 발표했는데 도미니언 전시회는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시회였다. 캘거리 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시설을 확충해 경주용 트랙을 건설하고 파빌리온을 6개 세웠다.
그 때부터 로데오, 경마, 마차경기가 더욱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도미니언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불경기임에도 7일 동안 1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려 들었다.
-스템피드 와 흥행사 Guy Weadick-
스템피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 스템피드가 북미의 유명한 전시회가 된 것은 북미의 흥행사 Guy Weadick(1885-19530)영향이 컸다.
Guy Weadick은 미국인으로 로프를 이용해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마술사였다. 1908년 그는 도미니언 전시회에 공연을 위해 캘거리에 왔다 4년 후 다시 캘거리에 왔다. 그는 농산물 전시회에 ‘wild west’ 개념을 도입해 로데오나 경마 경기를 접목시키는 자신의 계획을 캘거리 시 공무원들에게 설득했으나 처음에 캘거리 시에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가축 판매 중간상들을 설득해 10만 불 자금 제공을 확약 받았다. 1912년은 스템피드로서는 중요한 해였다. 캘거리 시에서는 로데오 전용 경기장을 지었고 서부 캐나다에서 수백명의 카우 보이들이 몰려 들었을 뿐 아니라 미국, 맥시코에서도 카우보이 들이 몰려 들었다. 로데오 일등 상금은 2만 불이었다. 1912년 스템피드는 6일 동안 1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려 들어 12만불의 수익을 올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위니펙, 뉴욕 등지에서 흥행을 했다 실패한 Guy Weadick은 1919년 다시 캘거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캘거리 큰손 들이 선뜻 지원을 약속했다. 흥행의 흐름을 아는 Guy Weadick은 1차대전 귀환 용사들을 위한 ‘빅토리 스템피드’를 개최해 또 한번 대박을 터뜨렸다.
1919년, Guy Weadick과 캘거리 산업 전시회 매니저, E.L. Richardson은 로데오와 캘거리 산업 전시회를 공동주최 하기로 합의했고 1923년에는 두 사람이 Calgary Exhibition & Stempede를 공동 설립해 연례 행사로 주관하게 되었다.
캘거리 스템피드를 한 단계 업 그레이드 시킨 Guy Weadick은 Richardson과 법정 소송을 하는 둥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나 1952년 스템피드에서 퍼레이드 총 지휘자로 초대 받았다. 이듬 해 그는 스템피드를 뒤로 한채 영면에 들어 갔다.
-스템피드, 그 후-
스템피드는 1950년대 북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이벤트였다. 보브 호프 빙 크로스비를 비롯해 헐리우드 스타들이 퍼레이드 지휘를 맡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도 1959년 스템피드에 참석했다. 여왕은 1973년에도 스템피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입장객이 50만명을 넘은 것은 1962년이었다. 1966년에는 6십5만명으로 뛰어 올랐다. 10년이 지난 1976년에는 입장객이 백만명을 뛰어넘는 기록을 세웠다.
오일샌드 개발로 캘거리가 서부 캐나다의 에네지 허브(Hub)가 되었지만 스템피드는 서부 개척 시대의 정신적 유산, 목축과 농업에 연관되는 이벤트를 최우선으로 유지할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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