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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계절 8월 _ 기자수첩
-분단의 시작, 38선-
1945년 8월15일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날로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기쁜 날이다. 그러나 기쁨과 감격도 잠시였고 민족의 분단이 시작되는 아픔이 시작되었다. 그 아픔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U-20 청소년 여자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지난 8월5일 대회가 시작되었는데 그날 오후 북한과 핀란드 경기가 토론토 내셔날 사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날 경기에는 미국에선 온 응원단들이 한반도 기와 ‘Korea is One’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 셔츠를 입고 북한 응원을 하다 국제축구연맹(FIFA) 관계자로부터 제재를 당했다. 우리들에게는 남, 북한이 하나의 민족으로 한반도 기가 분단의 아픔을 딛고 통일의 염원을 담은 상징이지만 국제축구연맹은 한반도 기를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 것에서 시작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한 것은 일본과 러시아가 그 시초다. 러시아 일본은 38선을 경계로 조선이 완충국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완충국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되었다.
그 후 일본은 2차대전을 시작하면서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이 38 이북을 담당하고 38이남은 일본 대본영이 직접 담당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일본이 세워놓았던 계획을 해방 후 미국이 그대로 차용해 38 이북은 소련군이 38이남은 미군이 담당해 일본군 무장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로 되었다. 이런 계획이 결정된 것은 포츠담 선언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군사적 역할을 분담할 경계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남북을 통하는 주요 도로에 검문소와 팻말을 세우는 정도로 왕래는 자유로웠다.
-자주 국가 수립 노력-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종전이 연합군의 군사적 우위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사실이고 카이로 선언, 얄타 협정, 포츠담 선언 등 일련의 조치에서 연합국이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우리도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 의병 활동을 통해 빼앗긴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웠으며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력전과 외교전을 병행해 일본에 대항했다. 그 후 중경으로 이전한 임시정부는 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선전성명’을 발표했다.
1944년에는 독립군 부대와 일본군에 있던 조선 병사들이 연계해 45년 8월29일(국치일)에 본토 진공을 목표로 계획을 세웠으나 2주전에 일본이 항복해 계획이 무산되었다.
1944년 8월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건국동맹에는 온건한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한 전국적 조직이었다. 건국동맹은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일본군으로부터 무기를 인수받아 자체무장을 했다.
그리고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기 전에 국가형태를 갖추려고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국무총리에는 허헌을 추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상해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한민당 계열의 친미주의자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 구상을 했다. 미국에 협조적인 친미주의자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친일파들이었다.
미국이 상해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부터 극렬 공산주의자까지 망라되어 있어 미국이 꺼렸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독립운동가 음해 방해공작도 더 큰 작용을 했다. 친일파들로서는 민족주의자가 되었건 사회주의자가 되었건 공산주의자가 되었건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줄어드는 것은 물론 장차 반민족 반역자로 처벌 받을 것이 명약관화 하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친일파들은 친미주의자로 변신해 실권을 쥐고 있는 미국에 접근했다.
-마지막 기회, 좌우합작운동-
해방되던 해 겨울, 12월16일-26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여 조선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이 최소 5년간 신탁통치 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서는 지금 읽어봐도 무작정 반대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은 신탁통치 찬성, 반대로 나누어 격렬한 정쟁을 벌였다.
공산당인 박헌영은 신탁통치에 대해 미온적 반응을 보이다 찬성으로 돌아섰고 김구, 이승만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김규식 등 중도파는 신탁통치 반대가 비현실적이란 사실을 깨닫고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다.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중도파는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미국으로서는 좌우를 망라한 통일정부를 세워 조선을 독립 시킬 구상을 갖고 있어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좌우 온건파들이 좌우합작회담을 시작했다. 온건 우파는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최동호, 김붕준 등이 온건 좌파는 여운형, 성주식, 이영, 정백, 정노식 등이 참가했다.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도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목표는 이념과 사상을 떠나 중도성향의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좌파 우파가 모여 좌파가 주장하는 8개조항과 우파가 주장하는 5개조항을 모아 7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유상몰수•무상분배)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파 우파가 모여 타협과 양보로 작성한 7개원칙에 대해 처음에는 김구, 이승만도 찬성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한민당의 반대가 극심했다. 김성수를 비롯해 한민당이 반대하는 이유는 3항 토지개혁, 유상몰수 무상분배가 지주들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4항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문제에도 한민당은 반대했다.
박헌영은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이후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자 월북해 좌우합작 7개항을 ‘기회주의자들의 발상’이라고 비판하며 전면 반대했다. 극우파나 극좌파가 조국통일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대표적인 경우를 좌우합작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최악의 비극, 조국 분단-
좌우합작운동이 실패하자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통일정부 수립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 1946년 6월 이승만은 남한을 순회하며 연설을 하다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이승만의 정치 성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발언으로 그는 이때부터 단독정부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단독정부는 국토분단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를 뒷받침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을 거듭했다. 좌우합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작 된 남북협상도 무위로 끝났다. 이승만, 한민당, 독립촉성회는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그렇다고 분단의 책임이 단독정부를 주장한 이승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남한과 일언반구 상의 없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공산정권 수립에 나섰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상 만들어진 38선이 분단국가가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민족분단의 기약 없는 기나 긴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유석은 홀로 아리랑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언제쯤 하나가 될까” 개인이나 국가 단체를 막론하고 인간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 분단이 우리 의사와 달리 외부적 영향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해도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통일되어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기사 등록일: 201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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