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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역이야기(1) _오충근의 역사기행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은 고대부터 신분사회로 신분이라는 사회적 제약의 너울을 벗어버린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아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흔히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나누는데 일본 중국에서는 사민(四民)이라고 부른다. 사민이란 온 백성을 통칭하는 말로 춘추전국시대 만들어진 개념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래 되었다. 일본에서는 사(士) 대신 사무라이가 있다.
조선은 신분제도를 경직되게 융통성 없게 적용했다. 사(士)는 절대불변의 기득권 지배층으로 남고 나머지 농공상이 중에서 농업사회니까 농업이 가장 중요했고, 사실 농업은 지금도 중요해 많은 나라들이 식량확보는 안보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편리하고 유용한 기구를 만들어 내는 공(工), 장인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물건 팔아 이익을 남기는 상(商)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국가 경영차원에서 농, 공에 밀린 것이다.
중종 때 기록인데 백성들이 농사를 안 짓고 잠업(뽕나무 심어 옷감 만드는 일)에 치중한다는 보고가 나온다. 잠업도 중요하지만 잠업은 말단이고 농사가 근본인데 백성들이 열에 아홉은 말단에 종사하고 하나가 근본이 되어 아홉을 먹여 살리니 농사가 점점 피폐해 진다는 것이다. 잠업이 이득이 많고 농사는 이득이 적으니 백성들이 논에 벼를 심지 않고 밭으로 개조해 뽕나무를 심는다고 지적하며 해결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도 재화에 대한 욕구 물질에 대한 욕구는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욕구를 인정해 농공상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해 균형발전을 꾀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농사에 치우쳤다.

조선시대 무역
조선시대에는 공무역과 사무역은 있었다. 공무역은 조공과 회사의 형식을 취했는데 외교정책과 맞물리는 것이다. 명나라,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주변에 조선, 안남, 태국 등등 여러 나라들이 번국이 되어 사대교린정책에 의해 큰 나라의 질서를 지키고 따르겠다는 것인데 요즘 유엔 회원국이 되어 유엔이 제시하는 국제질서를 지키고 따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황제국과 번국 사이에 사신이 오고 가는데 황제 뵈러 가는데 빈 손으로 갈 수 있겠나? 바리 바리 싣고 가는 것이다. 황제는 조무래기 들이 주는 걸 받아만 먹고 있으면 체면이 서겠는가? 사신 돌아갈 때 바리 바리 실어 보내야 하는데 황제가 되어서 받은 만큼만 딱 줄 수는 없고 더 많이 줘야 하는 게 불문율이다.
송나라 때 기록인데 안남(베트남)에서 사신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니까 송나라 조정에서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때 송나라는 금나라와 전쟁 중이었는데 황하 이북을 금나라에 다 빼앗기고 고전을 하고 있었다. 전쟁물자도 부족했다. 그럴 때 안남에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니 환영을 해야 할 일인데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주는 물건을 받아만 먹을 수는 없고 받은 것 이상으로 줘야 하는데 전쟁물자도 부족한 송나라의 고민이 거기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오지 말고 다음에 오라”고 할 수 밖에.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여진이나 왜(일본)에게는 조공을 받았다. 조공을 받으면 회사라고 해서 더 퍼서 줘야 한다. 명나라 청나라에서 많이 받아 오듯 왜, 여진에게 많이 퍼줘야 한다.

사무역, 인간의 욕심
조공과 회사가 공무역이라면 사신들이 오고 가면서 개인적으로 가져 가는 물건이 사무역에 해당했는데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서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사무역은 나라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대국을 섬긴다는 핑계로 실은 장사를 하는 것이다. 관리들 기강이 잡혀 있을 때에는 문제가 덜 하였으나 조선 중기부터 기강이 풀리면서 사신들이 중은 아니었으나 “염불에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 문제가 심각해졌다.
얼마나 문제가 심각했었냐 면 명나라에서는 과거시험 출제 문제에 “조선이 사대를 명분으로 이익을 도모하니 관계를 끊는 것이 좋은가?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좋은가?”에 대해 대책을 논하게 한 적이 있었다. 명나라에서 조선 사신들의 인식이 나빠 ‘장사꾼” 취급을 한 것에 대해 선조도 불쾌하게 생각해 “통탄 할 일”이라고 신하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명나라 갈 때는 외교사절로서 공적인 임무를 띠고 가지만 호조에서 돈(은전)을 빌려가 돌아 올 때 명나라 물건을 사와서 파는데 호조에 갚을 때 이자 2할을 따져 갚았다니 나라에서는 고리채 사업을 한 것이고 사신들은 숙소에까지 거간꾼을 끌어들여 흥정을 해 외교사절 숙소가 장터를 방불케 한 것이다.
세종 때 공조참의 이양(李揚)은 북경에 사신으로 갈 때 규정을 어기고 물건을 가지고 갔다 적발 되었는데 모시와 삼베 44필, 표피(담비 가죽) 60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평안도 숙천 사는 상인 손석을 종이라고 속여 데리고 갔는데 손석이 갖고 간 것이 모시와 삼베 237필, 담비가죽 200장, 인삼 12근, 진주 2냥이다.
또한 유후사(留後司) 소속 상인 박독대를 자기 종이라고 속여 데려갔는데 박독대가 가져간 물건도 규정 이상으로 많았다. 유후사는 조선 초기 개성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개성이 고려의 수도이자 조선 초기에도 수도라서 개성을 특별관리 했으니 박독대는 개성 상인이었다. 실록에 보면 그 후 이양은 벼슬이 올라 간 것으로 보아 벌을 받고 용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양 같은 부패한 관리가 한 두 명이 아니었으니 명나라에서 조선과 관계를 끊는 것이 어떻겠냐고 과거 시험에 출제를 한 것이다.
관리들 기강이 서 있던 세종 때도 이양 같은 부패한 관리가 있었는데 조선 중기에는 더 심했다. 선조실록에는 민인백이 사헌부로부터 탄핵 받는 내용이 실려 있다. 민인백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장사치 두 명을 수행원이라고 속여서 데려 간 것이다. 민인백은 진안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이 죽도로 있는 것을 알고 추격했던 인물로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공정하게 지방을 다스렸다는 평가는 받는 인물인데 명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오점을 남겨 탄핵을 당한 것이다.
사행사들이 부정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사신이 오고 감으로써 조선은 선진 문물을 받아드리는 기회가 되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적으로도 이익이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1사3년(사신을 3년에 한번씩만 보내라)고 했으나 조선에서는 “황제를 3년에 한번씩 뵌다면 어찌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일년에 세 번은 찾아 뵈어야지요”라고 해서 3사1년을 주장했으니 황제가 예뻐서 보려 가겠는가? 떨어지는 떡고물 때문에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행사 핵심, 역관
사행의 성격에 따라 사행사의 규모가 다르지만 통상 정사 부사 서장관 군관 역관 등 30여명에 이른다. 그리고 잡역에 종사하는 하인들, 마부, 짐꾼, 요리사 등 부수인원까지 합하면 몇 백 명이 된다. 이 인원이 북경까지 갔다 오려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부담하는 여행경비 외에도 많은 경비가 든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사행사 일행에게 인삼 10근씩 가져가게 허용을 했다. 인삼 10근에 해당하는 물품을 가져가 팔아서 여행경비 쓰라고 한 것이니 사무역을 인정한 것이다.
인삼 10근을 1포라고 하는데 허용량이 점점 늘어나 조선 중엽 이후부터는 일인당 8포를 허용했다. 팔포무역이란 말이 그 때부터 생겼을 것이다. 인삼 1근을 은 25냥으로 환산했으므로 1포면 250냥, 8포면 은 2,000냥으로 쌀 2천석을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은 2천냥씩 30명이면 보통 은 6만냥-7만냥이 소요되었다. 정조 때 기록을 보면 사행사 일행이 은 83,250냥을 가져갔다. 그 중 공무역에 쓰인 은이 8,701냥, 여행경비로 쓴 은이 833.14냥이고 나머지 73,716냥이 사무역으로 쓰였다.
사행사 중에서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역관이다. 역관은 통역이 주 임무이나 그 외에도 사행사 일행의 행정 재무 교통 수송 숙소 음식 등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역관들은 보통 10명-1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수석역관이 당상역관으로 업무를 총괄하고 나머지 역관들이 업무를 분담하였다.
정사 부사 서장관등 외교사절들은 갈 때마다 바뀌었으나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들은 바뀌지 않았다. 전문성을 고려해서인데 그로 인한 폐해도 많았다. 역관들이 공무역 사무역도 담당해 역관들은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외국 문물을 보고 배워 국내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기사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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