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기독교는 오랜 세월동안 종교적 문맹에서 헤어나지 못한체 죽어가면서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다. 종교문맹은 단지 기독교 내부의 심각한 문제일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에 걸림돌과 장애물이 되고 있다. 기독교의 종교적 문맹의 부정적인 증상에 대한 몇가지 사례를 들자면, 성서직역주의, 죄의식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보상심리의 믿음, 천국지옥-징벌축복의 이분법적 신학, 몸과 영혼의 관념적 이원론, 무조건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거짓과 은폐의 축복론,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 유신론, 인간 예수를 교리적인 예수로 변질시켜 하느님으로 숭상하는 신성론, 하느님이 우주를 6일만에 완성품으로 만들었다는 창조론 등이다. 더욱이 불행한 증세는 최후의 심판으로 지구는 멸망한다는 종말론과 죽은 후 다른 세계로 간다는 내세론에 따라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고, 과학이 공개적으로 계시(Public Revelation)하는 과학적인 발견들을 무시하고 거부한다. 좋은 예로, 인위적인 기후변화로 인간의 집 지구의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못본체 하며, 인간의 자연적인 성적본능과 여성들의 낙태를 반대한다.
특히 우주진화 세계관이 사회의 모든 영역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환경에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문맹 증상은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천국과 세상과 지옥의 삼층천(三層天)을 종교적인 교리로 무작정 믿는 것이다. 사실상 고대인들은 하늘 위의 창밖에 천국이 있고, 땅 아래에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이 있을 것으로 꿈꾸었다. 따라서 이러한 삼층 세계관으로 신화적인 경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우주를 날으는 우주선에서 밖을 내다보면 상층의 천국과 하층의 지옥은 없으며 다만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푸른 하늘뿐이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발견들을 수용하며,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 즉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과학적인 발견을 현실적인 사실로 인식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의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과학책 또는 역사책으로 착각하는 종교적 문맹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성서의 창조론을 우주의 생성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로 잘못 믿고 있다.
필자는 1988년 캐나다의 멕길대학 지질학 박사과정에서 종교학부로 전공을 바꾸어 신학사 과정을 밟으면서 역사적 예수의 진보적인 신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여졌다. 이때에 필자는 주일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주입된 ‘만들어진 예수’를 떠나보내고 ‘참 사람 예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바울의 다메석 체험과 같은 필자의 체험의 획기적인 원동력은 역사적 예수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미국의 ‘예수 세미나’였다. ‘예수 세미나’로 탄생한 학회는 오늘 웨스타 인스티튜트 학회 (www.westarinstitute.org)로 급성장하여 전 세계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계속해서 동참하고 있다. ‘예수 세미나’는 진보적인 초교파 학회로써 주요 목표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탐구를 통해 인습적인 기독교의 종교적 문맹을 퇴치하는 종교적 계몽에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예수 세미나의 종교적 계몽운동으로 인해 종교-과학-경제-정치-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예수 세미나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살아내기 운동’ 즉 종교적 계몽운동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 역사적 예수탐구를 통해 종교적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한국기독교연구소(www.historicaljesus.co.kr), 몸학기독교연구소 (www.freeview.org), 한국신학연구소(www.ktsi.or.kr) 등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문맹의 망상에서 해방하려면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성서저자(들)와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 준 책이 아니다. 즉 성서 저자들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성서는 인간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험한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 즉 자율적으로 깨달아 알게 된 궁극적인 진리를 하느님으로 표현한 순수한 인간의 작품이다. 물론 성서는 단행본이 아니라 저자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본들을 수집하여 그것들 중에 필요한 것들만 선택하여 편집한 책이다. 물론 저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 지식을 포함시켰다.
원초적으로 성서는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를 극복하기 위해 시와 신화를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무엇보다 성서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책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인간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책이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책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책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애당초 은유적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서 저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형식과 목적으로 성서를 기록했는지에 대한 성서비평(역사비평, 양식비평, 문학비평, 편집비평, 전승사비평. . .)이 필요하다. 성서비평은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다. 교회의 성경공부반은 교인들에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히고, 교리를 주입시키는 타율적인 교육 보다 성서비평을 통해 교인들이 스스로 성서의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는 자율적인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편, 창조론을 믿는 극소수의 과학자들은 구약성서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성서 저자들은 현대과학과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에 대해 상상도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이란 말과 그 개념은 17세기 이후 뉴톤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고대 성서는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세속적인 세상에서의 체험적인 삶을 시적으로 기록한 신화적인 책이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는 삼층 세계관적으로 믿고, 세상에서는 우주진화적으로 사는 이중적인 믿음은 큰 모순이며, 자신과 세상을 기만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가 된다. 니케아 신경이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후 지난 1700년 동안 이러한 이원론적 신앙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과학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다. 성서를 신화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하고, 은유적으로 읽는 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불신앙도 아니다. 오히려 성서에 솔직하고, 21세기에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성서의 역사비평은 이렇다: 창세기 1장의 천지가 창조된 이야기(참고: 창세기 2장의 인간이 창조된 이야기는 1장의 이야기보다 먼저 기원전 1000년 경에 기록되었다.)는 대략 바벨론 유배시기(기원전 587년) 전후이다. 바벨론 제국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민족의 새로운 정체성과 민족이 단결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따라서 성서를 재편집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정립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이다. 물론, 창조주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오직 기독교 성서에만 있는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형태의 신화(神話 Myth)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학형식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연현상들과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라는 문학적 장르를 사용했다. 창세기의 삼층 세계관은 당시 고대 중근동의 수메르 지역에 거주하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보편적인 신화적 세계관이었다. 또한 수메르 지역은 고대 중근동 신화들의 고향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이 수메르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우르였다.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 온 후에도 후손들은 여전히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삼층 세계관에 기초한 신화적 문화 속에서 살았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뿌리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삼층 세계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과 종교 역시 중근동 지역의 삼층 세계관과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기원후 1-2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도 삼층 세계관의 로마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변으로부터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교회의 미래가 있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다. 또한, 21세기의 우주진화 이야기에 근거하여 오직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과학시대에 기독교의 미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희망적인 미래는 무엇인가? 기독교교회는 우주진화 이야기를 기초로 인간과 생명체들을 포함한 세계적 문제와 자연과 생태계의 위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현세를 버리고 내세로 가는 것이 기독교의 미래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첨단과학시대의 기독교는 이러한 질문과 도전을 외면하기 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더 늦기 전에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삼층 세계관을 버리고, 우주는 한 몸이며,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는 우주진화적 세계관을 포용할 때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고대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실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5세기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학의 골격을 이루어왔다. 사도신경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고백한다. 그리스도론의 성격을 결정한 사도신경의 세계관은 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삼층 세계관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했다는 것은 바로 삼층 세계관에서 가질 수 있는 필연적인 표현이다. 즉 신들이 살고 있는 상층의 하늘로부터 인간이 살고 있는 중간층으로 사람의 몸으로 내려온 하느님이 예수다. 여기에서 성육신 또는 임마누엘 사상이 생겼다. 성육신한 예수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에 의하면, 예수는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최후심판을 집행하러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모든 인간들을 상층(천당)행과 하층(지옥)행으로 심판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종말론은 지극히 삼층 세계관적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성서보다 훨씬 전에 기록되었고 고대 세계에서 보편화된 고대 그리스 신화와 대단히 흡사하다. 오늘 호메로스(호모 기원전 8세기)의 일리어스(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오디세이)를 문자적으로 읽고 그 서사시가 실제적인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가장 심각한 영향은 이분법적 구원론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에 대한 내세론이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생각하기를, 상층에서 영생하는 신들이 땅과 하늘 사이를 마음대로 오르락 내리락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