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의 기자수첩) 이란, 그 수난의 역사 -..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공습을 시작해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해 이란 지도부를 궤멸시켰다. 공습으로 군사력이 무너지고 지도부가 붕괴되었으나 이란이 항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경파가 권력을 쥐고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적 계율로 민중을 폐쇄적으로 통제하는 이란의 종교독재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국가의 현재는 응축된 과거의 산물이다. 이란의 종교 독재에 숨겨진 반제국주의, 반외세, 서구 세계에 대한 불신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b]수난의 역사[/b]이란은 5천 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다. 한때는 페르시아 제국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도 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무수한 외세의 침범을 당한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사산 왕조 때 아랍의 침략으로 기존 종교 대신 이슬람으로 개종해 정신 세계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은 이란 역사에 남을 가장 파괴적인 침략이었다. 사파비 왕조(Safavid)는 근대 페르시아의 시작으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카자르 왕조는 무능, 부패, 사치로 5,000년 이란 역사에 최악의 왕조로 알려졌다. 이란은 러시아 제국과 다섯 번 전쟁을 했다. 4차 전쟁(1804-1813)의 패배로 굴리스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조지아, 다게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코카서스 북부 일대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러시아가 카스피해 통제권을 얻은 것도 이때다. [b]러시아가 남긴 상처[/b]이란은 실지를 회복하려고 러시아 제국과 다시 전쟁을 했다. 1826년-1828년의 5차 전쟁에서 다시 패해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 국가를 침공해 조약을 맺는 불평등 조약의 표준 조약이 되었다. 19세기-20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한 동양은 모두 불평등 조약의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당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했다. 영토가 찢겼다. 코카서스 일대의 광활한 지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완전히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때 설정된 국경은 현재의 이란 북쪽의 국경이다. 같은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은 이란 북부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으로 갈라졌다. 경제적 수탈이 뒤따랐다. 2,000만 루블의 전쟁 배상금을 러시아에 갚아야 했다. 세금이 대폭 인상되어 상인들과 농부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전쟁 배상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러시아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배상금을 챙기는 고리대금업으로 이란 경제를 피폐시켰다. 러시아 상품에 대해서는 5%의 관세만 부과해 값싼 러시아 제품이 밀려들어와 이란 제조업은 붕괴되고 러시아의 원자재 공급처로 전락했다. 또한 치외법권 인정으로 러시아인들은 이란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이란 국법이 아닌 러시아 영사가 재판했다. 이 불평등조약은 이란인들에게는 굴욕으로 “국치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란을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든 시초가 되었다. 현재 이란이 러시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있지만 이것은 “국제관계에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말대로 다극체제, 반미 등 공동의 목표를 가진 러시아와 정치. 안보, 경제적 이익에 따른 필요에 의한 관계일 뿐, 이란인들에게는 뿌리 깊은 러시아 불신이 담겨 있다. [b]영국의 지능적 수탈[/b]영국은 러시아처럼 영토를 침탈하지는 않았지만 조직적으로 이란을 착취했다. 전 세계적으로 근대화의 물결이 일어났으나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알딘 샤는 근대화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영국인 줄리어스 로이터 남작에게 모든 이권을 몰아주었다. 철도, 운하, 도로 건설하는 권리와 광산 채굴권, 은행 설립권 등 모든 산업 인프라 권한을 주었다. 기간은 무려 70년이었다. 영국은 화폐 발행권으로 이란의 재정을 통제하고 심지어 담배 독점권까지 확보해 담배 생산, 유통까지 손에 넣었다.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몰려온 서구 열강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을 상대로 각종 이권을 손에 넣었던 것과 똑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란에는 석유가 있다. 이란의 석유는 20세기 초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영국은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POC)를 설립해 60년간 석유 독점권을 확보했다. 이란 정부는 고작 16%의 로열티를 가져갔다. 처칠은 이란의 석유를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보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b]실패로 끝난 혁명[/b]왕실의 무능과 사치, 지도층의 부패, 러시아와 영국의 경제적 수탈과 착취, 고율의 세금으로 국민들의 삶은 한없이 피폐했다. 1870년 기근이 들어 200만 명이 굶어 죽었어도 정부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1906년 지식인, 이슬람 지도자, 상인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왕(샤)을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는 혁명을 승인하고 입법의회를 개원했다. 이것을 입헌혁명이라고 부른다.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입헌혁명의 한 가지 원인이다. 이란 지식인들은 “러시아 제국도 영국 제국도 물리치고 자주 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영국과 러시아는 혁명을 방해했다. 1907년 영-러 협정을 맺어 이란을 분할 점령해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 했다. 왕당파는 러시아 지원을 얻어 의사당을 폭격했다. 혁명 이후 혼란이 계속되다가 1921년 2월 레자 칸 장군의 쿠데타로 무능하고 부패한 카자르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팔라비 왕조가 등장했다. [b]파라비 왕조[/b]팔라비 1세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고 영국에서 벗어나려고 독일과 외교관계를 시작했고 소련과 관계도 멀리했다. 초기에는 근대화 개혁에 성공할 듯이 보였으나 무능과 안일, 도덕적 해이, 민심 이반으로 카자르 왕조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급격한 서구화와 세속주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란 사회의 이슬람 가치와 전통상인 바자르의 반감을 샀다. 이런 민심 이반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진다. 팔라비 1세는 2차 대전 중 영국과 소련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위한 후 망명하고 아들 팔라비 2세가 왕이 되었다. 팔라비 2세 때 모사데크 총리는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왕실 귀족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 왕권을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이란에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석유 기술자들이 한꺼번에 모두 철수하자 석유산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영국 해군은 해상을 봉쇄해 이란 석유가 다른 나라로 운송되는 것을 막았다. 그때 미국에는 메카시 선풍이 불었는데 영국은 미국에 이란의 정세 불안으로 이란이 공산화되면 석유가 소련으로 넘어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러자 미국 CIA는 공작을 펴 모사데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들의 반미 감정의 기폭제가 되었다. 모사데크 축출 후 왕권은 다시 강화되었고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팔라비 2세는 친미, 탈이슬람, 친이스라엘, 서구화 정책으로 이란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석유 수출로 생긴 막대한 외화는 일부 계층의 부를 증식시켜 오히려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왔고 왕실의 부정부패와 낭비는 더욱 심해졌다. 서구에서 교육받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세속화로 소외된 이슬람 세력이 합세해 규모가 커졌다. 급격한 서구화로 전통이 붕괴되면서 민심은 점점 떠나갔다.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정책으로 이란 사태를 수수방관한 반면 소련은 반정부 학생운동을 지원했고 사우디와 프랑스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다.이란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반정부 운동은 점점 규모를 더해 노동자들까지 합세했다. 팔라비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고 1979년 2월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b]국가의 장래는 국민들의 손에 [/b] 미국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하고 둘째 아들 모즈타바가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더 보수적이고 강경파로 알려졌고 혁명수비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어 점진적 민주화나 개혁보다 종교독재 시스템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5년 12월 경제난으로 시작된 시위가 정치적 투쟁으로 확산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이란 국민은 외세에 대한 적개심보다 체제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반외세 정서가 종교 독재의 밑거름이 되었다면 정부의 부패, 무능, 탄압이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내고 있다. 지금은 전쟁이라는 변수와 강경한 지도부, 혁명수비대의 물리적 장악력 때문에 안정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서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지만 이란 국민들의 마음은 이미 종교독재에서 떠났다. 2024-2025년 조사에 따르면 이란 국민 89%가 민주적 정치체제를 선호하고 73%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세속주의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종교 독재의 이념이 붕괴되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