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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에서_여는 글 2006-2-24
글 : 어진이 (토론토) “산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민의 삶이라는게 어떻게 보면 “삼넘어 산”인 것 같습니다. 이민초기에는 이민초기대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아이들도 컸고 귀도 입도 조금 열렸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그래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문제는 아이들의 키와 비례해서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좀 나아졌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을만 하면 큰일이 터지고 씀씀이는 더 커졌습니다.이민의 삶을 살면서 여자들이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들은 정말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맛벌이 부부가 되어야 하는게 이민의 삶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들은 아이들을 길러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합니다. 카나다에서는 아내들이 남편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저 집은 되는 집안이네!” 라고 이야기를 듣는 집들은 열이면 아홉은 아내들의 공입니다.남편들은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서 golf를 치면서 stress를 해소하지만 아내들은 남편들이 golf를 칠 때 하루종일 가계를 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돌아오길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그런데 남편들은 golf를 치고 19 hole에서 한잔 제끼면서 호기를 부립니다. 아내들은 한푼을 더 벌겠다고 어떤 때는 손님들과 승갱이를 하는데 남편들은 담배를 사오라고 신신당부하며 준 돈을 내기 golf에서 몽땅 잃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제가 어렸을 때는 6.25 동란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 때였습니다. 그때 어머니들이 악착같이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더우기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사람들의 경우는 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주신 강한 모성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민의 삶의 성패는 아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며”와 “오르기 힘든 나무”에 이어서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가 이번엔 순진이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빨래터에서”라고 잡았습니다. 순진이가 세탁소를 하면서 격었던 아름다운 추억의 이야기, 힘들었던 이야기, 가슴아팠던 이야기들을 써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춘기의 아들들의 이야기,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들을 쓸려고 합니다.저의 이민의 삶속에서 순진이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세탁소에게 일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아들들에게 꼭 따뜻한 아침을 먹여서 학교에 보냈고 저녁도 가능하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먹도록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저희집의 네 남자(저와 세 아들)들은 정말 순진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진이를 아내로, 어머니로 가지고 있는 저희들은 정말 행운아들입니다.글속에 나오는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는 순진이일 때가 많을 겁니다.앞으로 전개되는 순진이의 이야기에 기대(?)를 걸어 보세요. 감사합니다.힘내자: 저에게 도움이 될 많은 이야기가 보따리에서 술술 나올거 같은데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 배울것이 많을것 같아 미리 감사드려요.. 아이들 모두 학교 들어가면 저도 맞벌이 현장으로 나갈 계획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네요..어진이: 힘내자님, 안녕하셨지요?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할텐데……지나고 보니까 아이들에게 한 투자가 제일 큰 투자인 것 같아요.뒤볼아 보면 후회되는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터군요.아직 봄은 멀게만 느껴지는데 오긴 오겠지요?힘내자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핫이슈/사설
오충근의 기자수첩) 이란, 그 수난의 역사 -..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공습을 시작해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해 이란 지도부를 궤멸시켰다. 공습으로 군사력이 무너지고 지도부가 붕괴되었으나 이란이 항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경파가 권력을 쥐고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적 계율로 민중을 폐쇄적으로 통제하는 이란의 종교독재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국가의 현재는 응축된 과거의 산물이다. 이란의 종교 독재에 숨겨진 반제국주의, 반외세, 서구 세계에 대한 불신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b]수난의 역사[/b]이란은 5천 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다. 한때는 페르시아 제국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도 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무수한 외세의 침범을 당한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사산 왕조 때 아랍의 침략으로 기존 종교 대신 이슬람으로 개종해 정신 세계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은 이란 역사에 남을 가장 파괴적인 침략이었다. 사파비 왕조(Safavid)는 근대 페르시아의 시작으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카자르 왕조는 무능, 부패, 사치로 5,000년 이란 역사에 최악의 왕조로 알려졌다. 이란은 러시아 제국과 다섯 번 전쟁을 했다. 4차 전쟁(1804-1813)의 패배로 굴리스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조지아, 다게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코카서스 북부 일대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러시아가 카스피해 통제권을 얻은 것도 이때다. [b]러시아가 남긴 상처[/b]이란은 실지를 회복하려고 러시아 제국과 다시 전쟁을 했다. 1826년-1828년의 5차 전쟁에서 다시 패해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 국가를 침공해 조약을 맺는 불평등 조약의 표준 조약이 되었다. 19세기-20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한 동양은 모두 불평등 조약의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당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했다. 영토가 찢겼다. 코카서스 일대의 광활한 지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완전히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때 설정된 국경은 현재의 이란 북쪽의 국경이다. 같은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은 이란 북부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으로 갈라졌다. 경제적 수탈이 뒤따랐다. 2,000만 루블의 전쟁 배상금을 러시아에 갚아야 했다. 세금이 대폭 인상되어 상인들과 농부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전쟁 배상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러시아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배상금을 챙기는 고리대금업으로 이란 경제를 피폐시켰다. 러시아 상품에 대해서는 5%의 관세만 부과해 값싼 러시아 제품이 밀려들어와 이란 제조업은 붕괴되고 러시아의 원자재 공급처로 전락했다. 또한 치외법권 인정으로 러시아인들은 이란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이란 국법이 아닌 러시아 영사가 재판했다. 이 불평등조약은 이란인들에게는 굴욕으로 “국치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란을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든 시초가 되었다. 현재 이란이 러시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있지만 이것은 “국제관계에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말대로 다극체제, 반미 등 공동의 목표를 가진 러시아와 정치. 안보, 경제적 이익에 따른 필요에 의한 관계일 뿐, 이란인들에게는 뿌리 깊은 러시아 불신이 담겨 있다. [b]영국의 지능적 수탈[/b]영국은 러시아처럼 영토를 침탈하지는 않았지만 조직적으로 이란을 착취했다. 전 세계적으로 근대화의 물결이 일어났으나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알딘 샤는 근대화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영국인 줄리어스 로이터 남작에게 모든 이권을 몰아주었다. 철도, 운하, 도로 건설하는 권리와 광산 채굴권, 은행 설립권 등 모든 산업 인프라 권한을 주었다. 기간은 무려 70년이었다. 영국은 화폐 발행권으로 이란의 재정을 통제하고 심지어 담배 독점권까지 확보해 담배 생산, 유통까지 손에 넣었다.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몰려온 서구 열강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을 상대로 각종 이권을 손에 넣었던 것과 똑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란에는 석유가 있다. 이란의 석유는 20세기 초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영국은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POC)를 설립해 60년간 석유 독점권을 확보했다. 이란 정부는 고작 16%의 로열티를 가져갔다. 처칠은 이란의 석유를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보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b]실패로 끝난 혁명[/b]왕실의 무능과 사치, 지도층의 부패, 러시아와 영국의 경제적 수탈과 착취, 고율의 세금으로 국민들의 삶은 한없이 피폐했다. 1870년 기근이 들어 200만 명이 굶어 죽었어도 정부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1906년 지식인, 이슬람 지도자, 상인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왕(샤)을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는 혁명을 승인하고 입법의회를 개원했다. 이것을 입헌혁명이라고 부른다.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입헌혁명의 한 가지 원인이다. 이란 지식인들은 “러시아 제국도 영국 제국도 물리치고 자주 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영국과 러시아는 혁명을 방해했다. 1907년 영-러 협정을 맺어 이란을 분할 점령해 혁명을 무위로 돌리려 했다. 왕당파는 러시아 지원을 얻어 의사당을 폭격했다. 혁명 이후 혼란이 계속되다가 1921년 2월 레자 칸 장군의 쿠데타로 무능하고 부패한 카자르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팔라비 왕조가 등장했다. [b]파라비 왕조[/b]팔라비 1세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고 영국에서 벗어나려고 독일과 외교관계를 시작했고 소련과 관계도 멀리했다. 초기에는 근대화 개혁에 성공할 듯이 보였으나 무능과 안일, 도덕적 해이, 민심 이반으로 카자르 왕조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급격한 서구화와 세속주의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란 사회의 이슬람 가치와 전통상인 바자르의 반감을 샀다. 이런 민심 이반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진다. 팔라비 1세는 2차 대전 중 영국과 소련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위한 후 망명하고 아들 팔라비 2세가 왕이 되었다. 팔라비 2세 때 모사데크 총리는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왕실 귀족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 왕권을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이란에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석유 기술자들이 한꺼번에 모두 철수하자 석유산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영국 해군은 해상을 봉쇄해 이란 석유가 다른 나라로 운송되는 것을 막았다. 그때 미국에는 메카시 선풍이 불었는데 영국은 미국에 이란의 정세 불안으로 이란이 공산화되면 석유가 소련으로 넘어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러자 미국 CIA는 공작을 펴 모사데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들의 반미 감정의 기폭제가 되었다. 모사데크 축출 후 왕권은 다시 강화되었고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팔라비 2세는 친미, 탈이슬람, 친이스라엘, 서구화 정책으로 이란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석유 수출로 생긴 막대한 외화는 일부 계층의 부를 증식시켜 오히려 빈부격차의 심화를 가져왔고 왕실의 부정부패와 낭비는 더욱 심해졌다. 서구에서 교육받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세속화로 소외된 이슬람 세력이 합세해 규모가 커졌다. 급격한 서구화로 전통이 붕괴되면서 민심은 점점 떠나갔다.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정책으로 이란 사태를 수수방관한 반면 소련은 반정부 학생운동을 지원했고 사우디와 프랑스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다.이란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반정부 운동은 점점 규모를 더해 노동자들까지 합세했다. 팔라비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고 1979년 2월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b]국가의 장래는 국민들의 손에 [/b] 미국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하고 둘째 아들 모즈타바가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더 보수적이고 강경파로 알려졌고 혁명수비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어 점진적 민주화나 개혁보다 종교독재 시스템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5년 12월 경제난으로 시작된 시위가 정치적 투쟁으로 확산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이란 국민은 외세에 대한 적개심보다 체제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반외세 정서가 종교 독재의 밑거름이 되었다면 정부의 부패, 무능, 탄압이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내고 있다. 지금은 전쟁이라는 변수와 강경한 지도부, 혁명수비대의 물리적 장악력 때문에 안정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서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지만 이란 국민들의 마음은 이미 종교독재에서 떠났다. 2024-2025년 조사에 따르면 이란 국민 89%가 민주적 정치체제를 선호하고 73%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세속주의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종교 독재의 이념이 붕괴되었음을 말해준다.  
"기억하십니까? 9년전 그 사건, 그리고 그 ..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옛날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9년 전에, 그것도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이라 새로 이민오신 분들 중에는 모르시는 분 역시 많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소개해 드립니다.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의 어느 목사님 이야기 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이 나라 최대 개신교단(등록교인 수 약 2 백 80 만 명, 소속교회 약 4 천 개) 입니다. 이 교단은 1988년 동성애자 목사안수 인준(당시 총회장은 한국계 이상철목사)에 이어1997 년 총회장 Bill Phipps 목사의 기자회견사건으로 북미 사회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Bill Phipps 목사는 토론토 대학 Law School을 나온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시카고 대학 Theological School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분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뉴욕과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빈민운동에도 참여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인종차별 철폐운동도 함께 했습니다. 그는 1997년 8월, 캐나다 연합교회의 제36대 총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총회장이 된 후 그는 몇 차례에 걸친 기자회견에서 개신교 목사로서의 일종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문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Ottawa Citizen과의 회견 외에도 Fellowship Magazine의 Gail Reid 와의 회견에서는 교회의 비전과 관련해 솔직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했던 그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I believe Jesus lives in people's hearts and did from the moment of that Easter experience.”“저는 예수가 우리의 마음 속에 부활해 살아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I don't believe that in terms of the scientific fact. I don't know whether those things happened or not. Actually, I'm far more open to strange things happening and all that kind of thing than I used to be. I think it's an irrelevant question.”“그러나 저는 그의 육체적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지 않으며, 그런 사건이 실제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건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I think it’s the height of arrogance to claim that a particular group of people (Christians) know the only way to God.”“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생각은 특정 종교집단의 문화적 교만에서 비롯된 사상입니다.”“The fundamental truth to me in the biblical story is that God loves us and the world unconditionally, and part of that unconditional love is, for Christians, it was that unconditional love was poured into the person of Jesus.”“제가 이해하고 있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한하신 사랑이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일부의 형태가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질병 가난 전쟁 억압 등으로 고통 받는 형제들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종합 발언 요지)Phipps 의 기자회견이 보도되자 마자 북미의 보수 기독교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워졌습니다. 정작 캐나다 보다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계가 더 시끄럽게 비난하며 떠들어 댔습니다. 그들은 Phipps목사의 다른 말들은 몽땅 거두절미한 채 그가 ‘예수의 신성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했다는 것만 물고 늘어지며 Phipps의 총회장 자진사퇴 또는 강제 경질을 주장했습니다. 신앙심 깊은(?) 미국인들과는 달리 평소 교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캐나다 국민들도 이때만큼은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저명인사였던 이 거대교단의 새로 임명된 총회장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온통 주목했습니다. 북미의 보수교회들은 연합교회 교단의 총회장 경질이 당연한 것처럼 연일 목소리를 높였고, 일부 언론도 이 교단의 General Council이 총회장 경질을 불가피하게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1997년 11월 22일과 23일 양일(총회기는 21일부터 4일간)에 걸쳐 소집된 교단의 General Council이 격렬한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85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총회장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은사(unique gift)를 존중(respect)하고 이에 감사(gratitude)한다면서 그의 발언과 입장에 대한 지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General Council Member들의 개별 기자회견 내용 중 하이라이트입니다. “……He had provoked an important discussion moving us into a serious discussion of who Jesus Christ is, on the meaning of Jesus Christ in the modern world.” “……총회장은 중요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갖는 의미에 대해 보다 심오한 고민을 할 수 있게 했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다양성과 교인 각자의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각각 새로운 시대와 문화적 특성에 맞게 신앙의 내용을 변경할 수 있다는 입장을 일찌감치 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실상부한 북미의 대표적 진보교단으로서 캐나다 연합교회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캐나다 국민들을 비롯한 북미전체의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대다수국민들은 Phipps목사의 발언 자체보다, 사건화한 이 발언에 대한 캐나다 연합교회의 용기 있는 수용조치를 높이 평가하고 지지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한심한 사양산업으로만 생각했던 교회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부 보수적인 교인들이 이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이 사건은 교회 내외의 대중에게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각인시켜 보다 젊고 진보적인 층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교회를 젊어지게 하고 한층 역동적이게 만든 ‘선교’의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Bill Phipps의 임기 중 캐나다연합교회는 교회가 지난 세기 원주민 학교(Residential School)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행했던 학대와 폭력에 대해 공식사과 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에게 행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선교행위가 타 문화에 대해 무지했던 시대에 행해진, 기독교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다시 한번(198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인정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의 모범적인 행동들은 캐나다 연방정부와 의회의 정책 모델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연방정부가 19 세기와 2차 대전 중 일부 소수민족 그룹에 행했던 잘못된 행정조치 및 정책들에 대해 사과와 보상을 수행한 것, First Nation(원주민)에게 공식 사과 한 것, 교토협약에 캐나다가 가입한 것, 협박에 가까운 미국의 이라크전쟁 참전 강요에 연방정부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한 것,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 한 것 등의 이면에는 이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단이 한 정신적 지도그룹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97년 Bill Phipps사건이 그 동안 대학의 종교학과와 신학과 강의실 안에서나 다루어져 왔던 민감한 종교담론들을 급격하게 일반 평신도들에게 대중화시킨 계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성서비평학적 관점에서 성서를 주제로 한 해석상의 제반 문제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공개 토론할 수 있는 문화는 이 교단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문화는 새 세기 들어 밀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종교적 패러다임 변화에 관한 제반 쟁점들에 대해서도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당황하거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차분하게 신앙적 고민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항상 연구하고 질문하는 교회,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행위에 보조를 맞추어 따라 붙으려고 열심히 뛰어가는 교회, 이런 예쁜 교회의 모습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현(sarnia@hanmail.net)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7/7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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