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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나는 어려서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다. 1950년 다섯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고, 김해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부대가 이동을 할 때면 부대를 따라 이사를 해야 했다. 조금 자리를 잡을만 하면 이사를 가곤해서 항상 생소한 곳에서 학교생활을 했고 기초가 없이 학년만 올라가서, 나는 3학년이 됐어도 글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고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가슴 아파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한 것은 자기전에 아버지와 나란히 누어서 따라하라고 하시면, 떠듬떠듬 “가갸거겨……”를 따라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 아버지 심정은 어떠셨을까? 그래도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가갸거겨”를 가르쳐 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께 딱~ 한가지 불만이 있다. 아버지는 한번도 공부를 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조금만 Pressure를 주셨드라면, 지금 보다 더 잘 됐을텐데… 생각하곤 했다. 과외공부를 해 본 적도 없었고 학원을 다녀 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종종 “공부를 잘 하는 것 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피난갔다가 돌아와서 내가 초등학교에 다시 들어갈 때, 내 친구들은 모두 D초등학교에 다녔다. 사실은 S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는데… 그때 D초등학교는 명문이었다. 일류 중학교에 제일 많이 들어 간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딸 모두를 지지리궁상 S초등학교에 입학시키셨다. 너도나도 D초등학교에 들어 갈려고 애쓰던 시절에 아버지는 계속 “일류학교보다 사람은 정신이 똑바로 밖혀야 돼!”를 일관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겐 든든한 정신적인 버팀목이셨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뒤에서 2등을 했던 내가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아버지 덕이었다. 또 내가 아내를 만나서 세 아들을 기르면서 이만큼 살게 된 것도 아버지의 충고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충고가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아내와 결혼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의 삶에 영향을 주셨던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대학 3학년 여름, 어느 비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계 회사에서 10년을 일하시다가 회사가 미국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실직을 하셨다. 그때 나는 고2였다. 아버지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셨지만 여의치 않았다. 친한 친구의 권유로 브라질 이민을 결정하시고 살던 집을 처분하셨다. 월남한 이후 살아오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여간 가슴 아픈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수가 없었다. 업친데 덮친 격이라고 순조롭게 될 줄 알았던 이민이 질질 시간만 끌었다. 벌지 않고 쓰는 돈은 정말 무서웠다. 대학입학 시험을 눈앞에 둔 나에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다. “금방 이민 가게 될텐데, 공부는 해서 뭣해!”라는 유혹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나는 왈: 일류 대학에 합격했다. 그 후에 나는 학비를 면제해 주고 기숙사에서 숙식까지 제공해 준다는 대학에 2차로 다시 시험을 쳤다. 다행히 2차 대학에도 합격을 해서 일류대학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대학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어찌어찌해서 입학은 했더라도 중도에 대학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밑으로 넷이나 되는 동생들의 월사금도 내기 힘든 형편이었으니…… 훌쩍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결국 이민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동안 집팔고 모아두었던 돈은 야금야금 없어지더니, 내가 대학 3학년이 될 무렵에는 가세가 말이 아니었다. 살림은 줄고 줄어서 결국은 달동네 손바닥만한 방 두칸 짜리에서 아홉 식구가 살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기숙사에 있다가, 방학을 하면 집에 와있었는데 그 좁은 방에서 아홉 식구가 오골오골(?) 살았다.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여름 장마비는 왜 그렇게 주룩주룩내리던지…… 나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는 가정교사를 하러 다녔다. 보통 때는 점심 도시락이 있었지만 그 날은 도시락도 없었다. 하긴 도시락이라고 해야 맨밥에 반찬은 깨소금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다 찢어진 비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집에 있는 동생들은 점심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려나!’ ‘잘못하면 굶겠네!’ 아버지는 내 어깨를 꼬~옥 껴안고 걷고 계셨다. 비바람은 몰아치고 있었고 바지는 이미 허리 아래로 다 젖어 있었다. 우린 아무말 없이 걸었다. 점심 저녁을 먹을게 없는 가족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친구가 하는 상점에 가서 막일이라도 도와주실 생각으로 집을 나서신 아버지였다. 몇년 전만 해도 굴지의 미국회사에서 Manager로 일하셨던 분이셨는데…… 이젠 이민의 꿈도 살아지고, 모았던 재산도 바닥이 나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려나…… 아무말 없이 걸으시던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어딘아 힘들디~?” “전 괜찮아요. 아버지가 힘드시죠?” “나도 괜탄다. 거저~ 가족덜 보기레 힘들구나!” “……” 난 할 말이 없었다. “어딘아, 디금은 힘들디만 난 자신있다!” “……” “사람에겐 언젠간 기회레 온다!” “……” “그런데 고 기회라는거이~ 준비된 사람만 이 잡을 수 있는거야~!” “……” “언제가 될딘 모르디만 내 앞에 기회가 오면 난 잡을 자신이 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힘내세요” 우린 다시 아무말 없이 걸었다. 도서관 앞에서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여셨다. “어딘아, 너 여기 하루종일 있을거가?” “네, 여기 있다가 5시에 가정교사 하려 갈겁니다” “기래~? 어쩌면 내레 1시쯤 여기 올디도 모르갔다” “왜요?”라고 뭍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삐쩍 말라가지고 점심도 못 먹고 공부를 하다가 가정교사하려 가는 아들이 안쓰러우셨던 것이었다. 어떻게 돈이 좀 생기면 점심 때 오셔서 내게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실려고 하셨던 것 같았다. 찢어진 비닐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는 5시가 되어도 오시지 않았다. 40분을 걸어서 가정교사하는 집에 도착했다. 그집 주인은 서울 시경의 고위 간부라고 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중2였다. 머리는 있는 녀석인데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그리고 야구부에 속해 있어서 운동하느라고 공부를 더 못하는 경우였다. 평소에는 6시 정도면 저녁식사를 이미 끝내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날은 저녁이 좀 늦었다. 내가 집에 들어서니 마~악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음식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침먹고 하루종일 굶은 나의 뱃속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참기름에 계란을 지지는 냄새, 쏘세지 썰어서 지지는 냄새는 허기진 내 배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인사를 한 후에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저녁 잡수셨어요~?” 주인 사모님이 물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대답을 할까?’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네~ 했습니다~” 라고 대답해 버렸다. 그 집에는 내 나이 또래의 처녀가 있었는데 사모님의 동생이라고 했다. 서로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하는 사이였는데, 그 여자가 신경이 쓰인 것 같았다. 배에서는 계속 꼬로록 소리가 났다. ‘이~구 쨔식 존심은 있어 가지구……’ 그 때 내가 가르치던 녀석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쏘세지야~?” “미안해. 다음에 맛있있는거 해줄께” “쏘세지 먹는 것도 지겨워!” 순간 어린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먹지 못해서 누렇게 뜬 얼굴들이었다. ‘쌰~끼, 헛소리하고 있네. 뭐~ 쏘세지가 어쩌고 어째~?” 그때는 쏘세지가 귀하던 때였다. 어떻하다가 쏘세지를 한쪽 먹게 되면, 입속에서 가능한한 오래~ 오래~ 씹었다. 혀끝에 닿는 쏘세지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쏘세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게 아까워서 씹고 또 씹었다. 그러다가 쏘세지가 목구멍을 거쳐 넘어갈 때의 그 아쉬움이란…… 식곤증에 꾸벅꾸벅 조는 녀석을 다구치며 겨우 공부를 끝내고 터덜터덜 달동네 언덕을 올라갔다. 사실은 언덕이 아니고 산이었다. 우리 집은 거의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래서 밤이면 야경이 참 아름다웠다. 저녁거리는 다행히 누나가 밀가루표를 한장 구해서 주었기에 남동생이 찾아다가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지금도 곰표 밀가루로 만들어 먹던 칼국수의 맛을 잊지 못한다. 우리 집에서 밀가루 반죽의 일인자는 남동생이었다. 그의 손에 밀가루 반죽이 들어가면 그렇게 보들보들하게 반죽이 될 수가 없었다. 그가 만든 반죽과 방망이로 밀어서 만든 칼국수는 정말 일품이었다. 멀건 간장 국물에 만든 칼국수였지만, 두끼를 굶은 내게는 천하일미였다. 아버지는 월남에 기술자로 가실려고 여러곳에 신청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를 하셨다. 경험도 많으셨고 영어도 잘 하셨지만 나이가 문제였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50이 넘은 사람을 채용하겠다는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어깨는 더 처져보였다. 난 대학 3년을 끝내고 공군에 입대했다. 훈련이 겨의 끝날 무렵, 바닥을 박박 기고 내무반에 들어 오니 내무반장이 내게 편지 한장을 내밀었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편지였다. “…… 중략…… 어딘아, 비오던 날 너와 함께 찢어진 우산을 함께 쓰고 걷던 날을 기억하네? 내레 너한테 니야기 했디~? 난 기회가 오문 꼭 잡을 자신이 있다고… 내레 기회를 잡았다! 네레 훈련을 끝날 때쯤 해서 난 월남에 가 있을 거다. 거저~ 열심이 군대 생활 하라우~ 나도 월남에 가서 열심이 일하가따. …… 중략…… ” 아버지는 힘들게 월남에 가셨다. 그 많은 회사 가운데 나이을 초월해서 아버지의 실력과 경험을 인정해 준 회사가 딱~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열심이 일하셨다. 딸라가 좋긴 좋았다! 우리집은 2년만에 다시 일어났다. 비오던 날에 아버지와 함께 걸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나의 이민생활에 참 많은 도움과 용기를 주었다. “기회는 꼭 온다! 그러나 그 기회는 준비된 사람만이 잡는다” 힘들었던 이민의 삶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기회가 오면 잡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 될려고 많이 애썼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있어 봤자 별볼 일 없지만…… 아버지가 보고싶다! 비오던 날 내 어깨를 껴안고 걸으시던 아버지는 지금 나보다 젊으셨었다. 가족 일곱을 데리고 카나다에 이민오실 때도 아버지는 지금 나보다 젊으셨었다. 언땅에 누어서 내차를 고치시던 아버지께 고맙고 미안하다. 환갑이 넘으셨던 아버지가 손에 기름을 묻치며 아들의 차를 고치셔던 것은 모성에 못지 않는 부성 때문이었으리라! 어머니와 같이 망질을 하시던 아버지! 벌어진 앞니를 내보이시며 웃으시던 아버지! 잠이 든 아들 진이를 무릎에 안고 트랙터를 운전하시던 아버지! 아들들의 차를 고치실 때, 송글송글 땀이 배인 아버지의 벗겨진 머리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꼬리글: 아버지날이 닥아온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아버지날에 저녁대접을 해드린 기억이 없다. 그때는 어머니날은 지켰어도 아버지날은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께 죄송스럽다. 차~암 좋은 아버지셨는데…… 올해는 녀석들이 무엇을 해 줄려나? 변변치 못한 애비지만 받을건 받아야지!

기사 등록일: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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