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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는길_최우일 컬럼_25
 
어느새 여름이 다 사위었습니다. 엊그제만해도 파랗던 나뭇잎이 겆잡을 수 없이 누릇누릇 물이 흠뻑 들고있습니다. 길가에 성급한 낙엽까지 딩구는걸보니 ‘야, 정말 추위가 오는구나’ 싶습니다. 게다가 하늘이 꾸물거립니다. 눈이라도 내리려는가 마음이 옹송그려집니다. 고향에선 추석을 지냈으니 그럴 때도 되긴 했습니다.
고국에서 온 손님은 철빠른 캘거리가 자기가 어려서 떠난 이북의 어디만큼 춥다면서 으슬으슬해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러다가도 날씨가 깜짝 바뀌기도한다는 내 말에 설마하는 눈치였습니다.
태평양의 온화한 바닷바람이 밴쿠버를거쳐 록키산맥을 타고넘어 그 이켠 그러니까 캘거리의 상공에서 냉냉한 기류와 부딛치는 기온 현상을 시눅(Chinook)이라 합니다. 분수령을따라 시커먼 구름이 멍석말리듯면서 시눅이오면 밤새에도 기온이 치솟고 추위가 언제 그랬냐는듯 스르르 풀립니다.
그러나 저러나 하늘이 이리 찌뿌퉁해서야 어디 한가위라고…그분은 몇일도 않돼 벌써 고향의 하늘을 못잊어합니다. 맑고 높은 우리나라 하늘이야 어디서나 제일로 꼽을만합니다.
그러고보니 나는 고국을 떠난이래 여태 하늘 한번 제대로 못보며 살았습니다. 타향살이에서 언제 그리 느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내킨김에 창을 열어제킵니다. 잔뜩 찌푸린 구름 저켠, 록키산 쪽으로 쪼끔 내비췬 파란색이 참 청명합니다. 얼마전만해도 나의 창에서 내다보면 널다란 하늘이야 늘 있던 것이고, 길건너 동산에는 가끔씩 노루나 산토끼가 서성이고 들꽃도 지천이었는데 지금은 덩치 큰 집채들이 뭉개고 들어앉아 여기를 ‘씨닉 에이커’(Scenic Acre), 경관좋은 터라고 우기고들 있습니다.
물이 한껏든 나뭇닢하며 보름달하며 나는 고향생각이 수물수물합니다. 이럴땐 왜 춘천이 먼저 떠오르는지 모를일입니다. 뒷마당에 돗자리깔고 밤이슬맞으며 풀벌레를듣던 누이와 내가 살던 곳입니다.
소슬한 저녁 김장밭가장자리에는 수북한 국화가 밤이슬에 무거워 쓰러져있기도 했습니다. 헌데, 거기엔 없었던 도토리까지 아른거리는걸 보면 실은 춘천이 아니라 상주이거나 청주가 아니었을까? 산꼭대기에 올라있던 내 어릴적 청주집은 어둑어둑하니 나무들로 무성하여 그 속에 뭍인 추억의 깊이는 가늠조차 어렵지만…
이러면 내 마음은 심란하여져 고향으로떠날 채비를 합니다. 그간 몇차례 다녀온 나의나라 어디에고 고향의 흔적은 희미하고 국토건 국민이건 숨가뿐 번영의기계이기만 합니다.
잃어가는 바람냄새 물소리 뒷동산이나 하늘 이 모든것, 발전 이전으로 거슬러 저 근원인 곳에서 우리의 밑뿌리는 싹트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면 자연이란 의미를 떼어놓고 고향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향은 실제로 산천의 어떤 ‘곳’이면서 그곳의 얼굴들이기도 합니다. 오랜 객지에서 고단하여 잠시 들려도 더는 알아 볼 수 없이 바뀌고 그만 사람 없어진 고향에 나는 속이 상합니다.
우리네 족보에 없는 울긋불긋한 색을 뒤집어 쓴 지붕들이 늘어선 시골, 아무래도 내 고향으로는 못마땅하지만 토백이 몇이 남아있는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느해이던가 나는 동해선 완행열차 창밖으로 9월을 내다 보고 앉아있었습니다. 아직은 좀 이르다싶은 가을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옆자리에 동행이 된 시골아낙 영동에 다 와서야 어렵게 입을 뗍니다. ‘올 추수도 풍작은 아닌 가벼유.’ 폭풍 뭣인가가 휩쓸고 지나간 들을 원망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선 수줍은 사투리로 몇마디 더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은 농사일을 걱정했지만 내 체험과는 먼 것이어서 그냥 쑥스레 웃어넘기고 말았습니다. 내가 만난 진짜 고향사람 하나 였습니다.
고향하면 맨먼저 거슬리는 것은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도로망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먼저고 그리고는 길이 있었습니다. 발길닿아 구불구불 다져진 길(路)은 보통사람들이 자연스레 만들어간 삶의 길(道)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뜻이 통하고 모든 길이 소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새 길(新作路)이 샛길로 빠지면서부터 바른길(正道)을 놓치고, 세상은 성급해지기만 했습니다. 이젠 사람들은 비켜세우고 큰길이 앞서 열립니다. 발전이란 음모(陰謀)로 재면서 대번에 구획짖고 깍고 뚫어 길(道)길(路)이 나대면서 우리의 강토에 가로세로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삶의 걸음새(步調)는 모든이들에게 맞추어져야 하는 것인데… 이래서 고향이 망가지게 되었다고 굳이 의심없는 나 입니다.
도로는 시골길이 아닌 것입니다. 내 어릴적 시오리는 한나절 길이었습니다. 잔솔밭을지나 시내를가려면 후즐근 땀에절어 소금끼가 잠뱅이에 배어나는 길이었습니다. 장터에선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공복 (空腹)은 눈으로만 요기하고 돌아가는 길, 터벅터벅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조금 불편도하고 힘은들었어도 사람들은 주인행세를 아주 의젓이하며 세상을 살었습니다.
지금, 승용차안에 편히 앉아서 꼼짝없이 다른 또 하나의 텔레비젼)같은 차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다만보며 잘 산다고 믿고있습니다. 서로들 모른체 스치는 남남, 내 땅밟고 내 하늘쳐다보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수천리도 내달아야하는 고속도로이니 간간히 휴게소가 있기도 해야겠지만 진정 숨돌리고 땀씻는 곳이 못되고 수라장이되어 있는것은, 여기 또한 사람사는 길이아니라 번영의 길가이기만 해서입니다. 도로는 우리들에게서 고향을 빼았고 있습니다.
엊그제가 고향의 추석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땅을갈며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명절을 지켰습니다. 귀성객으로 붐비는 길, 또 길(道路), 한결같이 고가품으로 맞춘 백화점 선물꾸러미 추석이 아니라 농번기를 힘겹게 보내고나서 후유하니 곳간 한번 든든한데 하늘까지 맑고높아서 마음도 둥둥실려 으뜸인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난 뿌리뽑혀 낮선곳에 이식(移植)되기 수십년째, 열매는 맺을 짬도없이 시들고 말것같아 안절부절입니다. 이러다간 속병이 도지겠습니다. 가을 색이 불그레하니 내 마음을 달궈 놓은것입니다. 낙엽이 타는 계절은 누구에게나 힘든 계절입니다.
어쩌면 금년의 마지막이 될 것같아 이 가을을 한번 더 새겨두고 싶었습니다. 산동네 언덕받이에서 보자면 ‘보우’강 건너짝에 ‘보우네스’공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내가 서있는 저아래 강수면을따라 나트막하니 나르는 기러기떼를 목격하였습니다. 올해는 철이 이른 것인가 아니면 내 기억이 엇나간 것인가, 뜻밖이었습니다.
방향이 엉뚱한 것으로보나 불과 몇마리인 것으로보아 아마 길동무를 불러모으며 비행연습을 해두는 것은 아닐까? 제철이면 한꺼번에 수십마리씩 대오를짓고 소란스레 고공비행을 하는게 보통입니다. 늘 공중높이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눈아래로 내려다 보는 것도 새로웠지만 찬찬히 꼽아본 아홉마리 홀수라는 것이 얹짠키만했습니다. 짝을이루고 사는 새인데 어쩌다 한 놈은 혼자가 되었을까? 10월은 모두에게 몹시 아픈 달입니다.
8월을 꼬옥 짜서 물감튕겨 9월 하늘이 청아하고, 10월에는 어짜피 혼자 남을 나입니다. 그렇지만 1월이면 새로 시작하는 나의 고향그림 속에는 소년시절이 들어 있습니다. 거긴 꿈같은 하늘도 있습니다. 이젠 돌아 갈 수 없이 희미해진 고향길, 그 끝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추억이 피어오릅니다.
푸르스레 산자락에 뭍여 띠엄띠엄 연기피어 올리는 마을, 어느 초가쪽으로 내 마음은 설렁입니다. 해거름에 길게느린 수수밭 그림자끼고서 한가하니 뻗은 시골길을가며 오늘일랑 나의 고향을 맘껏 취(醉)하고 내일은 하다만 풍경에 손질을 마져 하렵니다.
(이 글에 있는 삽화는 제가 십수년전 수채화에 관심을 가졌을 때 습작삼아 다른 작가의 그림을 본따 그려본 것입니다. 이 그 림의 화가는 어느 건축사라는것만 기억에 남을뿐 입니다. 원작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형편없이 못미치는 것이어서 혹여 누가될까 염려됩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11/12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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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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