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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앙의 수호자들_간략한 기독교 역사 13
간략한 기독교 역사_13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목사 1. 갑바도기아인들 - 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동방수도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가이사랴의 바실"은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그의 감독 선출은 아리우스파인 로마황제와의 대결을 불러 일으켰다. 황제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단호한 태도로 신앙을 수호하였다. 황제가 가이사랴를 방문하여 가이사랴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헌금을 가지고 왔을 때, 아무도 이것을 받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바실은 이때 황제의 헌물을 용납함으로서 자기가 황제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바실의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는 동생이 사망한 후에 니케아파를 이끄는 지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끝난 후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의 고문이 되어 제국 전체를 여행하며 신앙을 가르쳤다. 니케아 정통신학이 굳건하게 확립된 후에 그레고리는 원하던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후세에 알려지지 않았다. 바실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3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등장하였다.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로마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전체에서 단 한 개의 정통 교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친척집에서 정통 신앙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거리에 나서기만 하면 폭도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고, 아리우스파 수도사들이 그의 예배당에 난입하여 제단을 더럽히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완강하게 버텼고,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립된 이후로 그레고리는 고향에 돌아와 찬송을 작곡하고 목회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60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일체의 세속적, 종교적 사치와 화려함에서 멀리 떠난 생활을 하였다. 2. 황금의 입 -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수도사로 살기 원하던 "존 크리소스톰"이 처음에는 안디옥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곧 398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은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로서 모든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철두철미한 수도사인 존은 콘스탄티노플의 부유한 시민들이 복음과 아울러 향락을 동시에 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먼저, 성직자의 집에 있던 '영적 자매들'을 쫓아내고, 성직자들에게 엄격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시하였다. 교회 재정에 대해서도 철저한 감사를 시작하였다. 또한 평신도들에게도 복음서에 나타난 명령에 따라 도덕적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서 강단에서 외쳤다. 도시의 유력한 사람들은 당시에 가장 큰 교회인 성소피아 교회당의 강단에서 쏟아지는 예언자의 목소리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권력자들이 크리소스톰이 적수가 되고 말았다. 결국 존은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도시를 떠나게 된다. 귀양지에서 중병에 걸린 존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조그만 교회당에서 성찬을 받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에,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설교,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이라는 설교를 하고 생을 마치게 되었다. 3. 밀란의 암브로스(Ambrose of Milan) 373년 밀란의 아리우스파 감독이 사망하자, 감독 선출 문제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의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 총독이었던 '암브로스'는 난동을 방지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교회에서 흥분한 군중들을 향해 연설을 하였다. 뛰어난 웅변가였던 암브로스의 연설로 질서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한 어린 아이가 "암브로스를 감독으로!"라고 소리 질렀고,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소리를 외쳤다. 암브로스는 이런 요청을 거부하고 도시를 떠나려 하였다. 하지만, 황제가 자신의 총독이 감독으로 선출된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거절하면 황제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있게 되자 그는 밀란의 감독직을 수락하였다. 암브로스는 비록 자기가 원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일단 감독에 임명되자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목회하였다. 고트족이 포로의 몸값을 요구할 때, 암브로스는 교회 소유의 각종 장식품을 녹여 포로의 몸값으로 지불하였다. 그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였다. 암브로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주님을 위해 황금보다는 영혼들을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 사도들에게 황금을 주지 않고 세상에 내보낸 하나님께서는 또한 황금없이 교회들을 모으셨다. 교회는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러 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북아프리카 출신의 젊은 웅변 선생도 섞여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의 영적순례를 거친 후 암브로스의 설교에 감동하여 그가 오래전에 버렸던 어머니의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어거스틴(Augustine)"이라는 이름의 이 젊은 청년은 결국 암브로스의 손에 세례를 받게 된다. 암브로스는 이 젊은이의 비범한 재질에 관해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지만, 그는 후에 사도 바울 이래 서방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인물로 자라나게 된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4/8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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