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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종교개혁2 (간략한 기독교 역사)
에드워드 6세 헨리의 뒤를 계승한 외아들 에드워드는 원래 병약했기 때문에 6년 밖에 재위(在位) 하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재위 기간 중 처음 3년 동안은 서머셋(Somerset)이 섭정하였는데, 이 시기에 교회의 개혁은 큰 진보를 가져왔다. 평신도들에게도 성찬식의 포도주가 주어졌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고, 교회의 각종 성상들은 철거되었다. 그러나 서머셋의 섭정 기간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업적은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출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기도서를 통해 잉글랜드인들은 처음으로 자기들 말로 된 예배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메리 튜더(Mary Tudor)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메리는 평생을 통해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녀가 어렸을 적에 그녀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만약 헨리가 주장했던 대로 그가 교회의 수장인 동시에 그와 캐더린의 결혼이 무효라 한다면 메리는 사생아였으며, 따라서 그녀의 왕위 계승권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개인적 확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메리는 잉글랜드 내에 로마 가톨릭을 다시 수복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자신의 입지가 굳어졌다고 생각하자마자, 메리는 점차 프로테스탄트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1554년 말 잉글랜드는 공식적으로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였다. 헨리와 에드워드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조처들이 철회되었다. 이미 결혼한 성직자들에게는 아내들을 내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드디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거의 300명 가량이 사형을 당했으며 투옥되거나 유배, 망명의 길을 떠난 인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녀에게는 오늘까지도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있다. 엘리자벳 메리는 1558년 말에 사망하였으며, 헨리 8세와 앤 볼린 사이에 태어난 이복동생 엘리자벳이 그 뒤를 이었다. 엘리자벳이 즉위하자 종교적 이유로 왕국을 떠났던 많은 인사들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물론 대륙에서 획득한 쯔빙글리 및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메리가 자기 자신의 신념과 아울러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가톨릭 신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비슷한 이유로서 프로테스탄트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영국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아닌 교황이라 한다면,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더린의 결혼이 유효한 것이 되며, 따라서 캐더린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앤 볼린에게서 출생한 엘리자벳은 사생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교황이었던 바울 4세는 만약 엘리자벳이 계속 로마 교회와의 관계만 유지한다면 헨리의 합법적 결혼을 인정해 주겠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자기의 즉위 사실 조차 교황에게 통지하지 않았으며, 곧장 로마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비록 엘리자벳은 메리보다 더욱 정치적 성향이 강했지만 자기 아버지가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것은 옳은 조처였다고 확신하는 가운데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엘리자벳은 극단적 프로테스탄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물론 교회의 통일성을 꾀하고자 하였으며 왕국 전체에서 공통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견들을 기꺼이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꿈꾸었던 교회 내에서는 로마 가톨릭이나 극단적 프로테스탄트주의가 발 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 교회의 공통적 예배에 참석하는 한 일체의 프로테스탄트파들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중용(中庸)의 모습이 앵글리칸 교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앵글리칸 교회라 하면 영국 국교와 주로 영국의 이전 식민지에 존재하는 영국 국교로부터 파생된 교파를 의미한다. 엘리자벳의 재위 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잉글랜드 내에서 매우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스코틀랜드에 유배당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지지하였다. 만약 엘리자벳이 사생아라 한다면, 메리 스튜어트가 합법적인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였다. 따라서 그녀야말로 교황이 엘리자벳에 대한 일체의 충성 의무를 면제하였던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수차례에 걸친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가톨릭 지도자들은 엘리자벳을 이단적인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녀를 실각시킨 후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할 음모를 꾸몄다. 한편 해외로 쫓겨나가 있던 가톨릭 신학교의 졸업생들은 비밀리에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들의 비밀 예배와 여왕과 그녀의 정부에 대한 음모들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비밀리에 잠입한 신부들과 가톨릭 음모자들은 모두 체포되기만 하면 처형당했다. 엘리자벳의 재위 기간 동안 종교적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는 메리 튜더 아래 처형된 사람들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재위 기간이 메리보다 10배나 길었다. 어쨌든 엘리자벳의 생애 말기에 이르러 여왕에 대한 정치적 충성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분의 기초 위에서 이들에게는 결국 공개적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신봉할 자유가 주어졌다. 또한 "청교도(Puritan)"들의 숫자가 증가했던 것도 엘리자벳의 재위 기간 말이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적 이상을 간직한 인물들로서 신약이 제시하는 순수한 종교 생활과 교리들을 실현하고자 애썼기 때문에 "청교도"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잉글랜드의 종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보다 더 나중의 일이다. 이들에 관한 역사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기사 등록일: 200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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