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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청교도 혁명_1 (간략한 기독교 역사)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가능한 전통적인 신조와 예배 의식을 보전하고자 했던 보수주의자들과 성경의 규범에 따라 일체의 교회 생활과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칼빈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위치하는 중도 정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살아있는 동안 유지 되었을 뿐이었다. 청교도의 등장 1603년 사망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를 합법적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그리하여 스튜어트 가문은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그를 항상 외국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정부를 다스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실현되기는 했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연합은 양쪽에서 많은 반대자를 낳게 되었다. 원래 엘리자베스는 중상정책(重商政策)을 시행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세력이 상당히 강력하였다. 상인들은 귀족들만을 우대하는 제임스의 정책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제임스가 가장 큰 곤란을 겪었던 상대는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잉글랜드에서 충분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왕실과 귀족들의 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국왕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는 좀더 발전된 종교 개혁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의 칼빈주의자는 자기들의 고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원래 하나의 집단을 조직되었다든지 아니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를 붙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Puritan(청교도)" 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교회가 성경적 종교로 돌아가도록 "청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십자가 사용이라든지, 사제의 예복이라든지, 제단에서 행하는 성찬식 등 잉글랜드 교회 속에 남아 있는 전통적 요소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명령에 따른 '경건한 생활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사치와 허례 허식에 반대하였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 의식 가운데 많은 부분이 필요 없이 화려한 것으로 보였으므로 이러한 예배 의식에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특히 잉글랜드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했던 술로 인한 방탕의 모습에 대하여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많은 청교도들은 주교들에게 대적하였다. 그 이유는 감독제도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후세의 조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조직과 체제에 있어서도 성경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개교회가 모든 다른 개교회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독립파"라고 부리웠다. 그 가운데 몇몇은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성인들에게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침례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이들 여러 집단들은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주로 칼빈, 쯔빙글리, 그리고 다른 스위스 개혁가들의 가르침을 좇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보다 극단적인 인물들은 제세례파의 전통을 이어 받기도 하였다. 한편 공식 교회는 이들과 평행선을 그으면서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중도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영국 국교(The Church of England)의 지도적 신학자들은 당시 시행되었던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신학적 혹은 성경 주해에 의거한 각종 예식의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영국 내에서의 개혁 운동이 "가톨릭 주의"로 퇴보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제임스가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이런 요소들이 잠재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제임스가 즉위하자 오랫동안 숨어있던 긴장 상태가 점차 폭력을 동반하여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교도들은 가톨릭을 철저하게 따랐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사실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들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이상은 프랑스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절대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로교 신자인 스코틀랜드 국민은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잉글랜드에세 자기의 권력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감독제도를 강화하였다. 원래 가톨릭은 교황에서 절대적인 충성을 멩세하고 있는 잠재적인 반역자들이었기 때문에 제임스는 주교들이야말로 가장 충실하고 유용하게 왕실을 지지할 세력이라고 확신하여서 감독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임스의 재위 기간에 공식 교회와 청교도들 사이의 불화는 계속 증가하였다. 이러한 때에 제임스는 새로운 세금을 걷기 위하여 의회를 소집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있는 하원에서 감독제도를 인정하는 교회법에 대하여 국왕에 항소하였다. 청교도들 가운데 하나가 "장로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제임스는 잉글랜드 왕국과 장로회 사이는 마치 하나님과 사탄의 사이만큼이나 멀다고 선언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양측의 화해를 위한 여러 작업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다만 1611년에 흔히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라고 하는 성경만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때에 국왕과 청교도 의원들을 암살하기 위한 가톨릭 신자의 시도가 발각되었다. 곧 수천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투옥 당하게 되었다. 결국 제임스는 가톨릭 측과 프로테스탄트 측의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2/16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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