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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청교도 혁명_2
찰스 1세 임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는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강력한 중앙집권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의회와 충돌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그들 나름대로 왕의 본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왕은 스페인과 국왕은 스페인과의 협상이 실패한 후,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찰스는 결혼을 위해 영국 내의 가톨릭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으며, 또한 새로운 왕비와 수행원들은 계속 자기들의 종교 의식을 거행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많은 청교도들은 이것을 우상 숭배가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어떤 이들은 사석에서 새로운 와이를 이세벨에 비교하기도 했다. 결국 국왕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의회 없이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국왕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며 의회의 승인 없이는 이것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수차례에 걸쳐 의회를 소집했으나, 하원 측에서는 세금의 비준 문제를 다루기 전에 다른 사건들을 먼저 다루기를 주장했으므로 해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찰스는 하원 의원들 가운데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에게 작위를 내려 이에 보상했다. 하지만 그 결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평민이 아니기 때문에 하원에 속할 수 없었으므로 미약한 지지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본 귀족들도 왕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직접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11년 동안 상류층은 번영했다. 그러나 임금의 증가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으므로 일부 부유층은 부를 독점하는 데 반해 국민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찰스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얻기 위해 더욱 더 귀족층을 옹호했으며, 귀족층은 빈곤층을 더욱 더 착취했다. 이 모습을 본 국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몇 가지 대책을 세우기는 했으나, 이러한 임시 방편으로 해결되기에는 근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너무나 뿌리 깊었다. 점차 국민 대다수의 눈에 왕과 그를 둘러싼 주교들은 대다수 국민들의 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청교도들은 왕실과 감독들의 사치를 비난했고, '새 이세벨'의 우상 숭배를 항의함으로써 급속히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1633년 청교도에 반대하는 '윌리엄 로드'가 켄터베리 대주교에 올랐다. 그는 성공회 방식의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종교의 통일이 필수적이라고 확신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찰스는 그에게 스코틀랜드까지도 감독하도록 했다. 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식의 예배 의식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발생한 폭동은 곧 반란으로 연결되어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40년 찰스는 스코틀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하원의 대부분 의원들은 왕보다도 오히려 반란군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찰스는 의회를 해산 하였다. 이 의회는 '단기 의회(Short Parliament)'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로 침입해 왔으며, 왕의 병사들은 도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찰스는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기 의회(Long Parliament)"가 시작되었다. 장기의회 장기의회의 소집 이전 수년 동안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가난은 '무산계급(proletariat)'만을 괴롭혔었는데, 이제 부르주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의회의 하원에 선출된 대표들의 대부분은 종교적 이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왕의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상공업에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출자했던 수많은 귀족들은 상원에서도 하원과 마찬가지로 왕의 권력을 제한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새 의회는 이전의 의회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단지 스코틀랜드의 반란 진압에 필요한 군대의 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지만, 의원들은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다. 우선 이들은 청교도주의를 파괴하고자 했던 인사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결국 의회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의회 직속 병사들을 모집하게 되었고 마침내 왕의 병사들과 의회의 군사들이 전투를 벌이게 되는 내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란 양측 모두가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찰스를 지원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귀족층이었다. 반면 의회를 지원한 것은 찰스의 통치 아래 고통을 겪은 계층이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하류층 출신이었으므로, 여기에 상인들과 몇몇 귀족들이 섞여 있었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측의 원조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다 장로교적 경향을 띤 정책들을 실시했다. 잉글랜들의 모든 청교도인들이 장로교 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인정하지은 않았으나, 국왕의 중요한 종교적 지원 세력이었던 감독제도에 반대하는 데에는 일치하고 있었다. 결국 '감독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감독들이 국왕을 지원했기 때문이고, 또한 감독들의 재산을 압수함으로써 의최측으로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함이 없이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의회측은 종교적 문제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erminster Assembly)'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의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 고백"이 칼빈주의의 정통 신학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었다. 의회측에서 군대를 강화하고 있을 때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급격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교도가 되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이나 혹은 정치적인 일체의 결정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기초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왕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소규모 기병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정열은 추종자들에게 전염되어 그가 거느리는 군대는 비록 숫자는 작았으나 강력한 기병대로 변모했고, 성전(聖戰)에 임한다고 확신했으므로 시편을 노래하며 전쟁터로 달려가곤 했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의회는 청교도 정책을 채택하여 주일날에는 반드시 종교적 행사만을 시행하도록 하고 일체의 방탕한 오락을 금지시키는 "청교도 혁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국왕과 감독들에 대항하여 단결했던 청교도들 사이에도 갈등이 생겨 1646년에 의회는 군대를 해산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찰스가 죽고 혼란한 가운데 크롬웰이 권력을 잡았다. '호민관'이 된 크롬웰은 교회와 국가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비록 크롬웰 자신은 독립파였으나,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일부 온건한 감독파 까지도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개발하고자 했다. 또한 철저한 청교도답게 주일, 경마, 투계, 극장 등에 관한 일련의 입법 조처를 통해 국가의 풍속을 개혁해 보고자 시도했다. 그의 경제 정책은 귀족층들 뿐만 아니라 빈곤층을 억제하여 중산층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유층과 극빈자들 사이에 크롬웰에 대한 반대가 증가했다. 크롬웰은 그의 생전 평온하게 국가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온한 공화국을 꿈꾸었던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사망 이후에 잉글랜드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정복고 후에도 청교도들의 이상은 계속 살아 남았으며, 그후 영국인들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문학가들이었던 '존 번연'과 '존 밀튼'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존 번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천로역정"은 일반 서민들의 경건 서적이 되었으며, 그 후 많은 세대를 두고 묵상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존 밀튼의 "실락원"은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의 대부분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2/16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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