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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란 정통주의 _ 간략한 기독교 역사 45
루터가 시작한 개혁 운동은 단지 실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부분이 더 중요하였다. 비록 그가 당시 교회 내에 만연해 있던 부정 부패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신학적 발견의 결과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언제나 올바른 믿음이야말로 교회를 위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물론 이 때문에 신자들이 모든 교리에 대하여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교역자요 친구였던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thon)'은 루터와 의견을 달리하는 점들이 많이 있었다. 루터 자신이 말하기를, 자신의 임무는 우선 큰 나무를 벌채해 버리고 암석들을 치워 버리는 것이며, 보다 참을성이 많은 멜란히톤의 임무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후세 사람들은 칼빈과 루터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으나,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을 읽은 후 매우 호의적인 평을 했다. 그러나 모든 인물들이 이처럼 넓은 도량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란의 다음 세대를 분열시킨 논쟁들의 모습을 보면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필립파와 엄격한 루터란들(Strict Lutheran) 루터가 죽은 후 당연히 멜란히톤이 루터란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해석가로서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러나 루터란 중에서 멜란히톤이 루터 신학의 충실한 추종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들이 중요시했던 점은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 경향이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공식적으로 결별을 한 후에도 멜란히톤은 에라스무스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멜란히톤이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멜란히톤은 루터가 인간 이성을 "더러운 이성"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했던 루터의 입장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서, 멜란히톤은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선행이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증거로서 중요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가 죽은 후 특히 과장되었던 루터와 멜란히톤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들은 곧 "필립파"와 "엄격한 루터란" 사이의 논쟁을 발생시켰다. 이런 갈등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과의 타협을 이루고자 했던 "아우그스부르크 임시 협정"(Augsburg Interim) 때문이었다. 루터란 지도자들은 이 협정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압력 때문에 멜란히톤이 이끄는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이 "라이프치히 임시 협정"(Leipzig Interim)이라는 수정안에 동의했다. 황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엄격한 루터란들은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이 루터의 교훈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멜란히톤은 이에 대해 '복음의 중추적 요소들'과 '부수적 요소들'을 구분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복음의 진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지켜 내야만 한다. 따라서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처럼 중요한 복음의 진수를 계속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부 부수적인 요소들을 타협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티아스 플라키우스"(Mattias Flacius)가 이끈 엄격한 루터란들은 비록 복음을 위해 중추적인 부분과 부수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명백한 신앙 고백이 요구된다고 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보통 부수적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요소들도 신앙 자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부인하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자기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는 이들은 부수적인 문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포기가 항복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플라키우스는 주장하기를, 비록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이 라이프치히 임시 협정을 받아들이면서 부수적인 문제에만 타협했더라도 결국은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갈등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엄격한 루터란들은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시한다고 비난하였다. 처음부터 "노예화한 의지"(enslaved will)라는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던 멜란히톤은 실제로 인간 의지에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옮아갔으며, 결국은 성령, 말씀, 그리고 인간 의지의 협동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엄격한 루터란들은 '죄의 결과로서의 인간 본성의 부패'를 강조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결국 1577년 "콘코드 신조"(Formular of Concord)를 만들어냈다. 이 신조문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의 대부분은 중용의 입장을 취하였다. 예를 들어, 신조문은 비록 복음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못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한 박해가 가해지는 경우에는 부수적인 문제들까지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정통주의의 승리 콘코드 신조문을 통해서 비텐베르크 파와 엄격한 루터란 사이에 논쟁이 그치지 않았으나 다음 세대들은 루터와 멜란히톤의 교훈들을 종합해보고자 했다. 그 결과 루터란과 가톨릭, 그리고 다른 형태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루터란주의 내에 공존하는 여러 가지 입장들 사이의 타협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으로 발생한 신학이 17, 18세기를 주도한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였다. 여기에 속한 신학자들은 중세의 스콜라 학파처럼 방대한 양의 신학저서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기초 위에서 신학을 설명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내용은 가톨릭과 전혀 달랐지만, 방법론이나 색깔은 당시의 가톨릭 신학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들은 18세기 말경에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두 가지 중요한 유산인 "성경 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신앙고백주의의 정신"을 남겼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1/6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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