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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자들의 등장_간략한 기독교 역사 48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교리에 관한 논쟁들과 기독교 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신비주의적인 경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또한 정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만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이런 교육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신학의 복잡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17, 18세기의 '신비주의 운동'은 편협한 교리주의에 식상해 있던 지식인들과 그리고 신비주의 운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무교육층들을 흡수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비주의 분파나 신비주의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낮았으나, 그 추종자들 속에는 보다 높은 교육과 사회 계층 출신들이 섞이게 되었다.

1. 야콥 뵈메
야콥 뵈메(1575-1624)는 독일 출생으로 그의 부모들은 투철한 루터란 신앙을 지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경건한 가정 속에서 젊은 야콥은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각종 신학 논쟁에 관한 지루한 해석에 불과했던 당시의 설교는 그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그는 14세때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견습 제화공으로 들어갔으며, 결국 이것이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도제(徒弟) 생활을 시작한 직후부터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선지자가 아니라 도제를 원했던 주인에게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뵈메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구두를 수선하는 방랑자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여행 가운데 당시 교회의 지도층이 끝없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논쟁들을 통해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내면적 경건 생활을 닦기로 결정한 후 이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는 세상과 인간 생활의 본성에 관한 일련의 결론들에 도달했으며, 이러한 결론들은 환상, 혹은 기타 신비스런 경험들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확신들과 경험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체 제화공으로의 단순한 생활에 만족했다. 그는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기록되었다.
야콥 뵈메가 신비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기억되는 이유는 그의 책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인 방향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은 신학자들의 '냉정한 교리주의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형식적인 교회의 의식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에 대하여 뵈메는 영혼의 자유, 내면적 생활, 그리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계시들을 중요시 했다. 뵈메는 생전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가 남긴 서적들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2. 조지 폭스와 퀘이커들
조지 폭스(1624-1691)는 뵈메가 죽던 해에 영국의 시골에서 출생하였다. 그 역시 평민 출신으로서 제화공의 견습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료 도제들의 방탕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19세 때 직업을 청산하고 방랑 생활을 하면서 각종 종교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했는데, 성경을 거의 암송했다고 전해진다.
폭스는 어떤 때는 진리의 탐구 작업에 절망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종교적 경험들을 통해 힘을 얻기도 하면서, 수많은 내면의 갈등을 경험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당시에 잉글랜드에 만연하고 있던 여러 교파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며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찬송, 예배 순서, 설교, 성례, 신앙 고백, 목회자 등은 모두 성령의 자유를 훼방하는 인간들의 발명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폭스는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주장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는 씨앗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진정한 길이었다.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모든 인간들 속에는 내면의 빛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빛 덕분으로 기독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지성, 인간의 도덕적 원칙 혹은 양심과 혼란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빛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 어떤 외형적 방법들을 통한 교제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폭스는 이런 생각을 처음에는 발설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침례주의자들의 집회에서 그가 믿고 있었던 확신을 발표했다. 그는 "위선자들과 삯군들"로 가득 찬 교회당을 찾아다니면서 예배를 방해하고 자기의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멸과 적의의 대상이 되었으며, 무수히 얻어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숫자가 급증했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가리켜 "빛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폭스의 추종자들이 종교적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마구 떠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떠는 자들"(Quakers)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 이름이 더욱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폭스는 성령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서 지나친 개인주의가 야기될 위험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개인적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곧 집단의 와해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폭스는 '공동체'와 '사랑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
폭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윌리엄 펜"(Willian Penn)이다. 그의 이름을 따라 '펜실베니아 주'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청교도 였던 펜은 1667년에 퀘이커 신도가 되었다.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아버지는 '광신자'같은 아들을 집에서 쫓아냈다.
자신의 신앙 때문에 런던탑에 투옥되기도 했던 펜은 아버지와 친구들의 중재로 석방되어 유럽을 여행하며 퀘이커 교리를 변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때 펜은 '성스러운 실험'에 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국왕은 펜에게 상당한 금액을 빚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현금으로 갚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펜실베니아 지방을 대신 지불하였다. 당시의 식민지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펜은 이곳에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실시하는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것만으로도 불온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을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은 그가 이미 국왕에게서 양도받은 토지를 다시 인디언들에게 대금을 지불하고 구입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펜은 당시 왕이 아니라 인디언들이야말로 토지의 합법적 소유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과 정착민들 사이에 화개 관계를 수립하여 서로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처럼 신성한 실험의 중심지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즉 "형제 사랑의 도시"라고 불렀다.
이곳의 초대 총독이었던 펜의 지도 하에 인디언들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유럽인들의 평화스러운 정착의 꿈이 실현될 듯했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난 1750년, 당시의 총독은 인디언들을 향해 선전 포고를 했고, 이 때문에 퀘이커들은 일체의 공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펜의 '신성한 실험' 가운데 일부였던 "종교의 자유의 원리"는 마침내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국가의 헌법 속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퀘이커들을 제외하고, 다른 신비주의 운동은 전체 교회와 사회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근본적인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내세 지향적이요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후세 교회에 남긴 것은 앞으로 살펴볼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2/3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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