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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주의 운동(1) - 독일의 경건주의와 진젠도르프 백작 _ 간략한 기독교 역사 49
"경건주의"(Pietism)는 신학자들의 독단적인 태도와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독단주의적 태도와 이성주의 모두가 기독교의 진수인 "살아있는 신앙"과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경건주의"는 단지 '스페너'와 '프란케'가 이끌었던 독일에서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영향 아래 있는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과 '웨슬리'(Wesley)의 움직임까지 살펴 보자.

1. 독일의 경건주의 : 스페너와 프란케
'경건주의'라고 불렸던 신앙운동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이미 이전부터 독일에 유포되어 있었지만,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를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철저한 루터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알사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프로테스탄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프랑크푸르투에서 목회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가 "경건의 모임들"(colleges of piety)이라고 불렀던 성경공부 및 경건회 모임을 설립했다.
1675년, 이런 사역을 시작한지 5년 후에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ederia)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성을 양육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담겨있는데, 결국은 이 서적이 경건주의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 책에서 스페너는 만민 제사장설을 강조하는 루터란의 입장을 통하여, 평신도들과 성직자간의 차이점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 책임에 중점을 두도록 제안했다 이것은 곧 평신도의 보다 열렬한 경건 훈련과 성경 공부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페너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그룹 운동"이 효과적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설교자들에게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억제하도록 요청했다. 왜냐하면, 설교란 설교자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페너는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시의 기존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에 관한 한 완전히 승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교리는 개인적 신앙의 대용물이 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주장했다. 왜냐하면 비록 신학적 오류가 개인들의 생활에 커다란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도그마 이상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의 풍요함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루터란 정통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스페너가 루터란 교리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들 신학자들이 밝혀 놓은 교리의 미세한 부분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루터란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인 부분도 한가지 있었다. 개혁주의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스페너는 루터란 교회가 성화와 성화의 필요성을 보다 더 강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정통 루터란 신학자들은 스페너가 사실은 칼빈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경건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과연 기독교 신앙이 단지 일반적 도덕성을 답습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신자들에게 불신자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생활을 요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설교가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단지 정확한 교리와 일반적 사회 규범에 맞는 도덕 생활만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항상 안정을 누리고 있던 교회들에게는 매우 받아들이기 거북한 도적이었다.
스페너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는 유복한 루터란 가정 출신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란케"(August Herrmann Francke)였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는 스페너와 달랐으나, 그밖의 점들에서는 대부분 스페너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스페너보다도 훨씬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 할 기쁨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의 개혁주의 경건파는 루터란 정통파와 같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부흥 운동이야말로 경건주의가 개혁주의 전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경건주의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생존 문제에 급급했던 16세기에는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선교에 힘을 기울이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1707년에 인도에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선교의 역사를 열게 되었고, 프란케의 지도 아래 할레 대학교는 선교사 훈련의 중심지가 되었다.

2.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경건주의는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드레스덴에서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모라비안'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원래 박해를 피해 고향인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였는데, 진젠도르프는 이들에게 자기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에 깊은 매력을 느낀 진젠도르프는 궁정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했다.
1731년 덴마크에 머무는 동안 진젠도르프는 루터란 선교사 '한스 에게드'에 의해 개종한 에스키모인들을 만났으며, 이로 인해 그의 가슴 속에는 여생을 뜨겁게 불태울 선교의 불이 타오르게 되었다.
1732년 카리브 연안에 최초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몇 년후에는 아프리카, 인도, 남아메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 등에서 모라비안 선

기사 등록일: 200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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