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경건주의 운동(2) - 요한 웨슬레(John Wesley)와 감리교(Methodists)
1735년 말부터 1736년 초까지 모라비안 제2진이 조지아 주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세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배에는 '존 웨슬리'(John Wesley)라는 이름의 영국 국교회 목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조지아 주지사 '오글레도르프'(Oglethorpe)의 초청을 받아 사반나(Savannah)에 목회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그 초청을 수락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목회자였다. 항해는 순조롭게 계속되었으며, 웨슬리는 서툰 독일어를 통해서나마 모라비안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기가 악화되어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었다. 만약 이런 폭풍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계속 찬송을 불렀던 모라비안들이 없었다면 선원들까지도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당시 이 선박의 임시 목회자이기도 했던 웨슬리는 이 고난을 통해 자기가 다른 여행자들보다도 자기의 목숨에만 연연하고 있음을 뼈져리게 깨닫게 되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모라비안들은 웨슬리에게 자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침착하고 용감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웨슬리는 신앙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는 항상 스스로를 모범적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으며, 모친인 '수잔나 웨슬리'는 목사의 딸이었다. 수잔나는 19명의 자녀에게 종교 및 도덕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존이 5살이었을 때 목사관에 불이 났다. 그는 거의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는데, 그 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한 특별한 계획이 계셔서 '불 속에서 닳은 쇠처럼 구해 내셨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 진학해서도 학문과 경건에 뛰어난 인물로 각광을 받았다. 옥스퍼드에서 그는 동생인 찰스와 여러 친구들이 조직한 신앙 단체인 '신성 클럽'(Holy Club)에 가입했다. 회원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며, 최소한 한 주에 한 번씩 성만찬을 갖고, 개인적으로도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을 위로하고, 매일 오후에 모여 3시간씩 성경 및 신학 서적들을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그 규칙들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에게 "Methodists"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런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존 웨슬리는 목회지인 조지아 주에서 목사로서 참담한 실패를 겪게 되었다. 그는 교인들이 '신성클럽'의 회원처럼 신앙생활을 할 것을 기대했는데 반해, 실제 회중들은 자기들이 예배에 참석해 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태도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회를 하던 웨슬리는 그가 청혼했던 젊은 여성의 문제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웨슬리가 청혼했던 젊은 여성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 젊은 여성의 생활이 신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웨슬리는 그녀에게 성찬을 베푸는 것을 거부했고, 이것 때문에 그는 명예 훼손죄로 고소당하게 되었다. 결국 혼란과 좌절 가운데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영국에 돌아와서 뚜렷한 소명을 찾지 못한 웨슬리는 다시 '피터 뵈레'(Peter Boehler)가 이끄는 모라비안들과 연락이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신앙이 부족하므로 더 이상 설교해서는 안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뵈레는 웨슬리가 이러한 신앙을 갖게 되기까지 계속 설교하고, 일단 이런 신앙을 갖게 되면 이로 인하여 계속 설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국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킨 경험을 갖게 되었다. 저녁에 나는 마지못해 알더스케이트에 있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해 그의 가슴 속에 일으키신 변화를 묘사할 때에 나는 나의 심장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가 나의 죄를 제거하였으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 후에 웨슬리는 더 이상 자기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더 이상 구원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후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는 우선 에른후트에 위치한 모라비안 공동체를 방문했다. 이 방문을 통해 웨슬리는 많은 감동을 받았으나, 모라비안의 신비주의는 자기의 성격과 사회적 관심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 동안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안이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웨슬리의 생애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신성클럽'의 또 다른 회원이었던 "조지 휘틀드"(George Whitefield)는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 웨슬리의 알더스게이트의 경험과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었으며, 이제 그는 조지아와 잉글랜드에게 주로 설교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공업도시 브리스톨(Bristol)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일부 비판자들은 그가 특히 야외에서 설교할 때 강단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브리스톨에서의 사역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고, 곧 다시 신대륙으로 돌아가야 했었으므로 웨슬리를 초청하여 대신 사역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웨슬리가 휘필드의 초청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휘필들의 감정적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나중에 그 당시를 회고한 바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엄격한 질서에 따라 수행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으므로 교회 건물 밖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마저 죄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사역의 결과를 보면서, 감정적인 설교에 대하여 유감으로 여겼지만, 그러한 형태의 설교들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그의 설교에 대한 반응에 대하여 항상 걱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생각하고 울고 통곡하는가 하면, 고통에 몸부림치고 기절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 이들은 자기들이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면서 희열에 넘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런 것보다는 엄숙한 예배를 원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이러한 경우들이 사탄과 성령 사이의 대결 때문이며, 그가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쨌든 웨슬리의 사역이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모습은 점점 더 뜸해졌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2/17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4-03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캘거리 부동산 시장, 2024년..
  연방치과보험 드디어 5월 1일 ..
  “주택정책 너무 이민자에 맞추지..
댓글 달린 뉴스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