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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John Wesley)와 감리교(Methodists) (II)_1
휘필드는 헌팅던(Huntingdon) 백작부인의 도움으로 '칼빈주의 감리교회'(Calvinist Methodist Church)를 조직했는데, 그 중심지는 주로 웨일즈 지방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시작할 의도가 없었다. 반대로 스스로를 앵글리칸 목사로 생각했으며,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 루터란 교회를 위해 그렇게 하듯, 영국 성공회 내에서 신자들의 신앙을 자극하고 양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자기 설교시간이 영국 성공회의 예배시간과 상충되지 않도록 계획하곤 했다. 또, 그는 이러한 감리파의 집회가 앵글리칸 교회 예배의 준비 단계로서, 성찬은 앵글리칸 교회에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는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중심을 성찬식이라 보았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 성공회의 공식 예배를 통해 이를 가능한 한 많이 갖도록 원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주도하는 운동을 독립된 교파로 발전시킬 의도는 없었으나, 어쨌든 조직이 필요했다. 이 운동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브리스톨에서 웨슬리 추종자들은 "Society" 를 조직하여 처음에는 개인 주택에서, 후에는 자기들의 건물에서 집회했다. 사람들은 야유하는 의미로 이들을 "감리파"(Methodists)라 불렀는데, 이들은 오히려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채택하여 사용했다. 그런데 이러한 감리파 협회들이 너무도 급성장하여 그 구성원들을 효과적으로 돌보지 못하게 되자, 웨슬리는 한 친구의 이견을 좇아 이들을 "속회(Class)"로 조직하여, 각각 11명당 지도자 1사람씩을 두었다. 이들은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며, 신앙 문제를 토론하고 헌금을 거두었다. 반드시 부유하거나 학식이 많지 않아도 지도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당시 영국 국교의 체제에서 소외감을 느낀 많은 이들이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 지도자가 이끄는 여성들만을 위한 속회를 설치함으로써, 감리파에서는 처음부터 여성들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이들의 조직은 급성장했으므로 웨슬리는 추종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영국 일대를 항상 여행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브리스톨 감독이 그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웨슬리의 전도 여행이 교구의 질서를 방해하고 있다고 나무라자 웨슬리는 "전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리하여 원래 융통성 없는 교회 조직에 대한 저항으로 내뱉은 이 한 마디가 후에는 감리교 선교 운동의 구호처럼 되었다. 어쨌든 웨슬리와 그가 일으킨 운동은 말씀을 전할 사람들을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몇몇 앵글리칸 사제들이 이에 합류했는데, 이들 가운데 특이한 인물은 수많은 찬송의 작자로 유명한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가장 열심히 일하는 인물은 존 웨슬리였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설교했으며, 70세에 이르도록 매년 말을 타고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평신도 설교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원래 웨슬리는 토마스 맥스필드라는 평신도가 런던의 한 Society 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이를 곧 중지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웨슬리의 모친 수잔나가 말하기를 성급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직접 말씀을 들어보라고 했다. 맥스필드의 설교에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은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가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감리파 운동의 시급한 설교가들의 수용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이들이 정식 성직자들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형태의 예배인 성찬식은 집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능은 마치 협회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교와 이에 부속된 정식 안수받은 인사들의 성례 기능과 병존하면서 이들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감리파의 평신도 설교가들 가운데에는 여러 여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안수 받은 성직자들 가운데에선 여성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의 추종자들을 "Connection" 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일단의 협회들이 한데 모여 "Cirucuit"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감리사"(superinten dent)의 지도 아래 있다. 이러한 전체 조직의 행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웨슬리는 이 운동에 속한 앵글리칸 성직자들과 평신도 설교가들을 포함하는 정기적 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모임은 "연례 총회"로 발전했다. 후에는 총회에서 보통 3년을 임기로 하는 각 "circuit"의 책임자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가운데 각종 난관이 뒤따랐다. 초기에는 감리파를 향한 폭력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일부 성직자와 귀족들은 감리파에서 하류층 출신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함을 고깝게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의 집회는 돈을 받은 깡패들에 의해 훼방받는 일이 많았으며, 웨슬리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점차 감소하여 마침내 종식되었다. 또한 신학적 갈등도 있었다. 웨슬리는 괴로운 심정으로 모라비안들과 결별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은둔주의에 끝내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갈등은 웨슬리가 속해 있었고 남아 있기를 원했던 앵글리칸 교회와의 사이에 발생했다. 그는 생의 말년까지 앵글리칸 교회로부터 이탈하기를 원하는 감리파 추종자들을 억제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2/24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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