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경건주의 운동(3)
그러나 양자간의 결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부 앵글리칸 지도자들은 감리파 운동 속에 약점이 반영된 걸 발견하고, 이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교구의 경계를 무시하고 어디서나 설교하는 감리파의 질서 교란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웨슬리 자신은 앵글리칸 분위기에 익숙했으므로, 처음부터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쨌든 교회가 찾지 않는 곳에 복음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미묘한 법률 문제가 사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영국법에 의하면 이 앵글리칸 예배의식과 교회 건물도 허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그 목적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등록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감리파는 어려운 곤경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 국교에서는 이들의 집회들과 건물들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감리파에서 따로 등록하게 되면, 이는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앵글리칸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등록하지 않으면, 이는 법을 범하는 것이었다. 1787년, 많은 주저 끝에 웨슬리는 수하 설교자들에게 등록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독립 교파의 형성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3년 전에 웨슬리는 이미 보다 더 극단적인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초대교회에서의 "감독"은 "장로"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안수받은 장로들에게는 또 다른 성직자들을 안수할 권한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 지도층과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합중국의 독립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독립전쟁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앵글리칸 성직자들은 영국 정부에 충성을 하고 있었으므로 미합중국 독립 후, 이들 대부분은 영국으로 귀환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성찬을 받기가 힘들거나 불가능하게 되었다. 형식적으로 여전히 이전의 식민지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런던 감독은 미합중국으로 갈 성직자들을 임명하기를 거부했다. 성찬이야말로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라고 확신했던 웨슬리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깊이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합중국 주민들의 영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784년 이 신생국가를 위해 두 사람의 평신도 설교가들을 장로로서 안수하고 앵글리칸 사제였던 "토마스 코크"를 "감독"(superintendent)에 임명했다. 그는 물론 이 단어가 헬라어로 "감독", 혹은 "주교"를 의미함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후에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 및 다른 지방에서 사역할 자들을 성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조처들을 행한 후에도 계속 영국 국교와 결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생 찰스는 신세계를 위한 교역자들의 성직 임명 자체가 이미 영국 국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1786년 총회는 다시 앵글리칸 교회들이 모든 주민들을 수용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 사제들이 무능력한 지역들에게서는 감리파 집회를 앵글리칸 예배와 상충하도록 개혁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웨슬리 자신은 끝까지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나, 그가 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이미 감리파가 독립된 교파로 변모하고 있었다. 감리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산업 혁명 때문에 야기되었던 새로운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화라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구가 공업중심지로 이동해 갔다. 여러 가지 경제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당시의 교구 체제로서는 급격히 증가한 도시 인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교회로부터 이탈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 가운데 감리주의는 그 수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는 오나전히 다른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정착민들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으므로, 수 많은 인구가 전통적인 교회의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개척민들 가운데 감리교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북아메리카 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보다 일찍이 공식적으로 독립 교회가 되었다. 1771년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 프란시스 애즈베리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감리교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는 국경과 보조를 맞추도록 조처한 것은 애즈베리였다. 13개 식민주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웨슬리는 이들의 반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내 감리교 설교가들은 독립 운동을 지지했으며, 최소한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미합중국내의 감리교 신자들은 계속 웨슬리를 존경하면서도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미합중국내의 감리파가 결국 감리주의 감독교회를 조직한 것도 웨슬리의 뜻을 어기는 줄을 알면서도 앵글리칸 성직자들이 부족했던 현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라는 명칭 자체가 웨슬리의 뜻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자신과 코크를 가리켜 감독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보다 평범한 용어인 "Superintendent"라고 칭했다. 그는 코크와 애즈베리가 자기를 가리켜 "감독"(Bishop)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때부터 아메리칸 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와는 달리 감독을 가지게 되었다. 웨슬리는 1791년 사망했다. 그 사후에, 감리교는 주로 앵글리칸 교회와의 관계의 문제를 둘러싼 내부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감리교는 날로 세력을 얻게 되었고, 앵글리칸 교회로부터 완전 독립한 감리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3/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4-03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연방치과보험 드디어 5월 1일 ..
  캘거리 부동산 시장, 2024년..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댓글 달린 뉴스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