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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기 힘든 나무(11번째): 아버님~ 편안히 가세요 2005-4-29
 
1982년 7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회사에는 하루 빠지겠노라고 연락을 해 놓고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으로 향했다. 이젠 얼마 못 사실거라는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몇달 만에 건강이 최악의 상태로 변했다. 평소에 B형 간염균을 가지고 계셨고 가끔 소화가 잘 안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아주 건강하셨던 아버지셨다. 일하실 때 보면 우리 젊은 사람들 보다 더 힘있게 일하셨는데……

병실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어제와 같이 입을 약간 벌리시고 힘들게 숨을 쉬고 계셨다. 벌써 거의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으셨다. 목에 가래가 끼었는지 숨소리가 무엇에 걸린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솜에 물을 묻쳐서 입술을 적셔드렸다. 그렇게 풍채가 좋으시던 모습은 간데가 없고 두볼은 푹 들어가 있었고, 두 팔은 앙상했다.

아버지가 의식이 있으실 때
“아버지,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했더니
“내레 뭐~ 할 말이 있간~?” 힘들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하실 말씀이……”
“내레 평소에 하던 말이 거저 유언 이라구 생각하라우”
“……”
“거저 너덜 잘 사는 것 보문 난 도타!”
“……”
“거저 형제덜 끼리 사이 도케 디내라”
“알가시요”
“내레 네 오마니 두구 가는거이……”
“……”

아버지 손을 가만히 잡아 보았다. 참 따뜻한 손이었다!
‘아버지가 의식이 있으실 때 좀 더 이야기를 할껄’후회스러웠다.
아내에게 병원에 잘 도착했노라고 전화를 하고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니 아까보다 숨쉬시는게 더 힘들어 보였다.
‘오히려 내가 대신 아파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 참 좋은 아버님이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시고 떠나게 해 주십시요” 몇일 전 까지만해도 “꼭 났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었는데… 어느새 기도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해드릴게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감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더 숨을 쉬기 원하시듯 힘겹게 숨을 쉬고 계셨다. 여지껏 조용히 누어계시던 아버지는 몸을 뒤체듯 몸을 움직이셨다.
‘어~ 어떻게 되신 거야? 여지껏 꼼짝도 못하시더니…’
아버지는 크게 숨을 한번 들어마시고는 아주 서서히 내쉬시셨다. 그리고는 다시는 들어 마시지 않으셨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손을 놓고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없으셨다. 한번 끊어진 숨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물끄럼이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 좋은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의 삶을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버님이 계셨기에 제가 세상에 태어 날수 있었던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의 아버님을 너무 일찍 부르셨습니다.
좀 더 건강하게 사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나님, 아버님의 영혼을 받아 주십시요”

아버지의 손은 그 때까지 따뜻했다.

아버지는 67세를 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에게는 큰 별과 같은 존재이셨던 아버지셨다. 참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주시고 희생하셨던 분이셨다.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셨다. 내가 어렸을 때 흔히 주위에서 볼 수 있었던 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많은 아버지들은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왔고 수틀리면 자식들을 두들겨패곤 했었다. 살기가 힘든 때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기억 속에 나는 한번도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는 공일날에(그때는 일요일을 그렇게 불렀다) 등산을 데리고 다니시던 분으로 기억 속에 남아계셨다.

어머니께는 성실한 생의 동반자이셨다. 어머니가 콩비지, 두부, 녹두지짐 등을 만드실 때면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 곁에서 망(맷돌)질을 하셨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집히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회사일로 출장을 많이 다니셨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진 못했지만 먹고 살만했던 시절, 아버지는 한 눈 한번 안 파셨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시곤 했다. 가끔 “정말 아까운 넝감 다 늙어간다!” 하시면서 아버지의 늙어가시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했다.

나의 삶 속에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께서 사셨던 삶의 모습들이 전해진 것 같다. 아버지는 튀지 않는 삶을 사시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셨다. 가정의 소중함을 보여주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셨다. 광산에서 일하셨던 할아버지가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려서 할아버지를 여위시고, 36살에 혼자되신 할머니와 네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시기 위해 안 해보신 일이 없으셨다고 했다. 결혼을 하셔서 줄줄이 생긴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만주에 가서셔 고생을 무척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20일 만에 걸어서 삼팔선을 넘으셨다고 했다. 한국전란 통에 부산, 김해, 평택, 서울을 전전하시며 사셨고 월남에 기술자로 가셨다가 큰형님의 초청으로 카나다에 오셨다.

아버지가 카나다에 오셨을 때, 아버지의 나이가 56세셨다. 늙은이 소리를 들을 나이에 직장에서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열심이 사셨다. 카나다에서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농장을 사셔서 흙과 함께 사셨다.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은 트랙터를 운전하시던 아버지의 무릅 위에서 잠들곤 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자동차를 돌보아 주는 mechanic이셨다. 언땅에 누어서 내 자동차의 Muffler를 고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참 좋은 아버지셨고 할아버지셨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가족들에게 연락해야지.”
정신이 번쩍들었다. 꽤 오랬동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빨리 전화해야지…… 간호사에게도 알리고…”
아버지는 주무시듯이 편안히 누어계셨다. 병실문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편안히 가십시요”


꼬리글: 아버지가 가신 후에 한참 동안 허전했다. 든든한 버팀목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처럼 순진하셨던 분이셨다. 꿈이 많으셨던 분이셨다. 이웃을 많이 배려해 주셨던 분이셨다.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셨던 분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비석에 “참되게 살려고 애쓰시던 아버님”이라고 새겨드렸다. 그때는 아버지가 꽤 나이가 많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너무 일찍 가신 것 같다. 주말에 아버지를 찾아가 뵈야겠다.



기사 등록일: 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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