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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너머 고개밑에 그들은 살아있을까_김덕선(캘거리 교민)
최근 김덕선 장로가 펴낸 본 책의 머릿말을 약 5회에 걸쳐 연재함을 알려드립니다. _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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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7년이 되었다.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그렇게 안타깝게 그리워하며 목메어 부르던 당신은 끝내 그리운 식구들을 보지 못하고 뼈에 사무친 원한의 일생을 마치셨다.
아버지는 매년 어머니의 생신날이 되면 주덕(충주 가까이 있는 지명)의 집 뒤 작은 언덕 위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어머니 이름을 부르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이 죽고 나면, 유해를 화장해서 그 재를 북으로 흐르는 강에 뿌려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1981년, 이북에서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소식은 1989년 가족과 생이별한지 39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동생들에게서 들었다.
첫 방문 때 동생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지난 39년 동안 일어났던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니는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와 나의 이름을 목메어 부르며 그리워 하셨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당신의 유해를 화장했다. 그러나 그 재를 강에 뿌리는 대신 북한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와 합장을 해드리고 싶어서 캐나다의 우리집에 가져와 모셔놓고 때를 기다렸으나, 북한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년째 되는 2004년, 캘거리에 있는 나의 집에서 가까운 묘지에 모셨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유해를 북한에 모셔서 우리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와 합장을 해드릴 날이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
생전에 이루지 못한 두 분의 애절한 꿈이 저 나라에서나마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별을 하게 된 우리 가족은 44년 동안 서로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 부모님의 이러한 비극적인 생애는 20세기 중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겪었던 아픈 역사의 한 토막이기 때문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픔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다 해방을 맞은 환희와 끝없이 부풀었던 희망은, 하루아침에 3 • 8선이란 장막으로 국토가 양단이 되어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동족끼리 총을 들이대며 서로 죽이는 6 • 25 전쟁으로 나라는 파괴되고 국민은 도탄에 빠지는 수치스런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사상투쟁이란 명목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이산가족이 생겨나는, 전 국민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눈물을 가져다 준 슬픈 시기였다.
그러니까 1950년 12월 8일이 우리 집안이 둘로 나뉘어져 영영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의 이별이 있던 그날보다 약 두 달 전인 10월 초에 이미 우리 국군과 UN군은 3 • 8선을 넘어 북진하는 중이었다. 우리 고향 원산에도 진입했으며 그들은 계속 북으로 전진하였다.
5년 동안 잔인하고 포악한 공산정치 밑에서 신음하던 시민들은 환호와 만세로 국군을 맞이하였다. 시민들은 곧 군정장관 산하에 시민자치회를 조직하고 나의 큰 할아버지 김리현 목사를 시장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나의 할아버지 김석현 의원은 세브란스 의대출신 의사로 원산에서는 잘 알려졌던 인물이며 자선사업도 많이 하시고 덕을 쌓았던 분으로 해방 직후에는 부시장까지 지내셨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을 반대하여 1947년 10월 비밀리에 발족된 대한민국 원산 지방정치 지도원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활약하시다가, 1948년 4월에 정치보위부에게 체포되어 재판 끝에 3년 징 역 선고를 받고 아오지 탄광에서 복역을 하고 계셨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당시 알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 후 원산시사元山示史에 의하면 함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반동의 집안자식이라 해서 학교에서나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고 주목을 당하였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공산당은 단지 사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을 품게 만들었고 그 원한은 증오심으로 커져갔다.
11월에는 백만의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써서 북한군을 도와 북쪽 압록강, 두만강 근처까지 진출했던 UN군과 국군을 밀어내어 남한군은 전면 후퇴를 하게 되었다. 원산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있는 도시로서 그동안 산에 숨어있던 공산당과 패잔병과 빨치산들이 활약을 하기 시작하려고 할 때, 초조한 일반시민의 유일한 후퇴 길은 바다밖에 없었다. 곧 후퇴가 임박하게 된 때도 마지막까지 믿을만한 정보는 없었고 근거 없는 소문과 유언비어로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갈팡질팡하였다.
드디어 원산시에서 국군이 해상으로 전면 후퇴하게 되었을 때 전체도시가 완전 혼란에 빠졌다. 퇴각하는 날에는 십오만 시민의 대부분이 유일한 탈출구인 항구로 모여 단 하나의 수송선을 타려고 결사적인 투쟁을 하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이루었다.
우리의 피난길은 끝이 없었고 군부는 끝까지 이것은 작전상의 임시후퇴라고 하며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아버지의 일기는 1950년 12월 7일 국군이 원산에서 후퇴하게 되었을 때 피란민 후송선을 타려는 시민들의 결사적인 투쟁에서 시작하여, 12월 8일 가족과 헤어졌던 숙명의 날을 거쳐 부산까지에 이르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1952년 말까지 부산에서 피난민으로 하꼬방(판자집)생활을 하며 두고 온 처자를 그리며 눈물짓던 기록이었다.
총소리 나는 피난길의 극한 상황에서 우리는 적나라한 인간상을 보게 되었다. 위엄과 예의를 찾고 우애와 도덕을 운운하던 위선의 탈을 벗고 동물의 세계로 돌아가는 부패한 인간상을 보는가 하면, 가난과 고난가운데서도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도움의 손을 내미는 귀한 마음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부패한 탐관오리들은 그 난리 통에서도 애국과 희생을 빙자하여 국민을 착취하며 괴롭혔다.
피난길 6개월 동안 동해안에 쌓인 눈으로 험한 산길을 걸어 자유의 나라 남한을 그리며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장애와 고난을 겪었다. 특히 국군이 계속 후퇴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투 속에서 오는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 가는 곳마다 남으로 내려가는 것을 재제하고 북한 피난민의 신분을 의심해 남하를 막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비애는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꿈을 찾고 낭만을 그리던 감수성이 많은 15세의 소년으로 피난의 역경 속에서 하루 아침에 무서운 세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자진해서 동냥을 나가고 장돌뱅이 노릇을 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피난 속에서 단련된 생활력은 후에 미국 유학시절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남기시고 간 유일한 유물인 이 전쟁의 고행인 일기를 정리하고 후손을 위해서 영문으로 번역해 한글과 영문 책자를 같이 발행하려고 시작했다. 그 시작이 벌써 십여 년이 훨씬 지났지만 이 일기를 대할 때마다 옛 상처를 헤집는 듯한 아픔과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해서 다시 덮어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나도 부모님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니 아버지가 남기셨던 이 유물 하나는 반드시 아버지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용기를 내었다. 생전에 너무나 불효했던 자식이 부모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에서 가장 비통한 장면은 12월 7일 새벽의 『기로』에 대한 기록이다. 배표를 다 얻지 못해 갈팡질팡하며 「시민자치회의 문교사회과」와 같이 행동하느냐 또는 「애국투사 후원회 일행」을 따르느냐 하는 두 갈래 길을 놓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 결국 안전하게 생각되는 길을 택한 것이 결국 우리 가족이 배를 탈 수 없게 된 너무도 잔인 한 운명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기로에서 잘못된 길을 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늘 괴로워 하셨다.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 우리 가족에게 비운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시고 두고두고 자책을 하셨다.
아버지는 처음 자기들만 살겠다고 연로한 할머니까지 버리고 떠나 버린 형님과 형수에 대한 원한이 대단했다. 특히 형수에게는 자기 친정동생 식구 넷과 가정부까지 데리고 가면서도 정작 할머니는 뒤로 남기고 떠났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갈리게 된 제일 큰 원인이 형수에게 있었다고 믿었으니 한때의 미운 마음이 왜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끝내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40년 가까운 여생에서 늘 형님을 웃어른으로 모시고 형제의 의의를 지키셨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우리 집안은 영영 헤어지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비애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영 어머니를 잃게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원한의 마음은 굳어지고 가슴 속에 박힌 못은 깊어졌다.
한 여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애들을 데리고(애들 여름방학 때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주덕에 갔을 때다. 아버지가 부산에 계신 큰아버지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라 하셨다. 나는 갈 수 없다고 했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가라고 하시는 재촉에 나는 가슴 속에 쌓이고 쌓였던 원한이 폭발하고 말았다. 가슴이 터질 듯 숨이 막히고 오열하며 비탄한 내 마음을 호소했다.
아버지와 아내가 놀라 나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물을 마시게 하고 누워서 안정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부산에 가서 큰아버지, 큰어머니에게 큰절을 하였다.
이 일기 중에서 나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12월 8일 아침 , 할아버지 집 대문 앞에서 "덕선아 잘 가거라" 하시던 나의 어머님의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다. 언제 돌아올지 막연한 부자를 떠나 보내며 서 계시던 어머님의 슬픈 얼굴은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의 눈앞에 생생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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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 구입을 희망하는 분은 CN드림 편집부로 연락 바랍니다. 권당 $12불.
☎ 403-875-7911

기사 등록일: 2013-11-01
운영팀 | 2022-06-01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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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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