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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조끼와 가두폭력의 역사_오충근의 기자수첩
 
에드먼튼에 등장한 노란 조끼

1월의 첫 토요일 에드먼튼 처칠 광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처칠 광장과 주 의사당 북쪽 광장은 시위 단골 장소다. 이날 시위에는 100여명의 노란 조끼 입은 시위대가 “이민자 제한” “탄소세 반대” “트럼프 정권 타도”를 외쳤다. “공정한 세금” “생활고”에 관한 피켓도 등장했다.
이 시위를 주도한 그룹은 NCA(National Citizens Alliance)로 지도자는 캘거리에 거주하는 스티븐 가비(Stephen Garvey)다. 가비는 반 이슬람 조직의 멤버였고 이슬람 혐오에 반대하는 자유당 정권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이날 NCA 시위에는 백인우월단체인 Soldiers of Odin도 동조 시위를 벌였다. 가비는 “우리와는 관계 없는 단체”라고 선을 그었지만 NCA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이날 NCA에 대한 맞불 집회도 동시에 열렸다. “이민자 환영” “증오 금지”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쳤다.
두 그룹의 열기가 높아지자 경찰병력이 개입해 두 그룹을 분리하고 라인을 그어 물리적 충돌을 미연에 방지했다. 지난 12월 시위에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 경찰이 소란 혐의로 2명을 체포한 적이 있다.
노란 조끼는 에드먼튼에만 등장한 게 아니고 캐나다 전역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노란 조끼는 시위 때마다 등장할 것이다.
시위에 노란 조끼 입는 게 전염병처럼 번지며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폭력성향을 보이자 파이프라인 건설 지지 그룹에서는 시위에 노란 조끼는 집에 두고 작업모와 작업복 차림에 나올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반정부 단체도 아니고 정치적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파이프라인 건설을 원할 뿐.”이라고 시위 성격을 밝혔다.

노란 조끼와 프랑스

노란 조끼는 운전자들에게 필수품으로 차량에 비치되어 있다. 노란 조끼가 프랑스 시위에 등장한 것은 2018년 11월 정부가 유류세 인상을 발표한 후다.
유럽 대도시들이 다 마찬가지지만 파리 집값은 살인적이다. 그래서 저 소득층은 파리에 살지 못하고 외곽에 살면서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는데 유류세 인상은 이들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유류세 인상 반대로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는 폭력시위로 치달았다. 파리 시내에서 약탈, 방화가 일어났고 개선문이 훼손되었다. 경찰도 최루탄, 물대포, 연막탄, 고무탄, 장갑차 동원으로 강경 대응했다. 시위로 4명이 사망하고 130명 부상, 400명이 체포되었다.
작년 11월17일 첫 번째 시위를 시작으로 1월9일 8차 시위가 있었는데 현지 언론은 5월혁명 이후 최대규모라고 전했다. 폭력시위 수위가 낮아지긴 했어도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두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경험이 많아 폭력시위는 프랑스 특유의 시위문화 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

프랑스는 7월14일을 혁명 기념일로 지킨다. 최초의 혁명인 1789년 7월14일부터 1871년 5월 파리 꼬뮨까지 혁명, 정변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는데 모든 혁명의 원조가 되는 첫 번째 혁명을 특별히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후 멀찌감치 5월혁명(일명 68혁명)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혁명은 손에 피를 묻히는 폭력을 수반한 혁명이었다. 민중혁명뿐 아니라 테르미도르 쿠데타, 프록티도르 쿠데타, 브르메르 쿠데타도 폭력을 수반한 정변이었다.
대혁명이 일어나던 7월14일을 전후한 3일, 파리는 무법천지의 폭동이 휩쓸었다. 약탈, 방화, 살인, 온갖 구호의 선동, 유럽 최대의 도시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폭도들은 군 병원인 앵발리드(Hotel des Invalides)로 몰려가 대포와 총을 탈취해 무장했다. 탈취한 총이 28,000정이라는 기록이 있다. 무장한 폭도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해 전제정치를 마감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앵발리드는 1670년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부상당한 퇴역군인들 불우한 노병들을 위해 짓기 시작한 군 요양시설로 이곳에서 재활 교육을 받았다. 지금도 건물의 일부가 군인들 재활 센터로 사용 되는데 대혁명 때 폭도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이 전쟁영웅 바렌 자작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한 이후 전쟁 영웅들이 묻히는 영묘가 되었다. 유배지 센트 헬레나에서 사망한 나폴레옹 시신도 앵발리드에 묻혀 있다.
3일 후 폭동은 혁명으로 승화되고 폭도들은 성스러운 애국자가 되었다. 3일간의 폭동에 대해 바뷔프는 “지배자들이 우리를 개화 시키지 않고 야만의 상태로 놔 두었다. 그들(지배자들)은 자기들이 뿌린 씨를 거두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거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100명 이상이 잔인하게 처형 되었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사열형, 수레에 걸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온갖 고문을 가해 죽이는 고문형. 뛰어난 선동가, 자꼬방, 좌파의 태두, 카알 마르크스의 사상적 스승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앞에 붙는 바뷔프가 보기에도 3일 동안의 폭동은 야만 상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어지는 폭력의 전통

“반란인가?” “혁명입니다.” 복고왕정도 공화국도 제정도 폭력에 의해 무너졌다. 후세 사가들은 7월혁명, 2월혁명등등 혁명으로 명명했지만 지배자의 질문과 신하들의 대답은 같았다. 폭력혁명이 전통이 된 이면에는 대혁명 때 ‘왕의 목을 친’ 경험이 작용했다. 유사이래 인류가 왕의 목을 친 경험은 흔치 않고 더구나 민중이 왕의 목을 친 경험은 희귀하다.
이 희귀한 경험이 민중에게는 자부심이 되어 샤를10세, 루이 필립, 루이 나폴레옹을 왕위에서 쫓아냈다. 다행스럽게 이들은 목을 온전히 보존한 채 영국으로 망명했다. 대혁명 때 목이 잘린 루이16세는 자청해서 목이 잘렸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을 왜곡하고 폄하하고 부정하는 세력들, 변화를 두려워하는 부패 기득권 세력이 혁명의 폭력성만 부각시키고 혁명 지도부가 마리 앙뜨와네트가 “빵 없으면 과자 먹으라”는 없는 말을 지어내어 민중의 분노를 폭발 시켰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빵 없으면 과자 먹으라.”고 말 한 적이 없다는 것은 베르사이유 궁전 관광하면 가이드가 이야기 해주는 이야기로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 유언비어가 퍼진 것은 1789년 10월 5일 이후다. 굶주림에 지친 가족들을 보다 못한 부인들이 베르사이유 궁전까지 행진하며 빵을 요구했다. 이것을 Dames des halles라고 한다.
그 때 마리 앙뜨와네트가 그런 말을 해 민중의 분노가 폭발 했다는 건데 민중의 분노는 이미 몇 달 전에 폭발해 더 폭발할 것도 없었다.
혁명이 일어났지만 루이16세는 왕위는 요지부동이었다. 혁명 1주년 행사에도 “국왕 만세” 소리가 “의회 만세” “국민 만세”를 압도할 정도도 왕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높았다. 혁명 지도자들도 국민들도 입헌군주제를 원했다. 그러나 루이16세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루이16세의 이중성은 1791년 6월20일 만천하에 드러났다. 왕과 왕비는 가족을 데리고 몰래 왕궁을 탈출해 오스트리아로 도망했다. 그러나 국민방위대가 바렌느에서 왕의 일가를 체포했다. 오스트리아는 마리 앙뜨와네트의 친정으로 왕과 왕비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힘을 빌려 혁명을 분쇄하고 전제왕권 복고를 획책하고 있었다.
왕이 국외로 탈출해 외국과 내통하여 혁명을 분쇄하고 조국을 팔아 넘기려 한 것은 명백한 반역으로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는 이 사건으로 국가 반역죄로 목이 잘리게 되어 있었다. 근친상간, 사치 방종 등 시중에 떠도는 낭설은 왕과 왕비 사형과는 전혀 무관한 본질을 벗어난 이야기로 글쟁이들의 글 장난에 불과하다.
폭력혁명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5월혁명(1968년 5월)에는 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몰려 드 골 대통령이 독일 공군기지로 피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신임을 얻지 못한 드 골 대통령은 사임했다.

캐나다는 프랑스가 아니다

프랑스 5월혁명의 진보적 가치는 전 세계로 퍼져 캐나다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유당 피에르 트뤼도가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되어 낙태 허용, 동성애 합법화, 복합문화 사회 등 개방적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유당 정책이 보수당에 비해 개방적이었으나 트뤼도 정부는 전임 피어슨 정부보다 진일보한 정권이었다.
피로 얼룩진 프랑스 역사와 달리 캐나다 역사를 보면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독립전쟁은 그만 두더라도 ‘독립 만세’ 한 번 없이 독립을 이뤘다. 연방 성립 이전 1812년 전쟁이나 루이 리엘 반란 같은 무력 분쟁이 있기는 있었지만 비폭력 독립은 캐나다의 정체성 확립에 많은 영향을 미쳐 세계적으로 캐나다는 평화, 중립, 온건 이미지를 갖고 있다.
비 폭력이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지만 캐나다인 역사 의식 공유에도 영향을 미쳐 캐나다에서 폭력은 절대 환영 받지 못한다. 캐나다의 비 폭력성은 미국 주도의 전쟁에 참전을 하지 않거나 제한적 참전으로 나타난다.
노란 조끼 착용은 시위참여자들의 연대의식 고취라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폭력까지 수입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앨버타에 절실한 파이프라인 건설은 정치 논리보다는 경제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으니 시위 참가할 때는 노란 조끼는 집에 두고 나오는 게 좋다.

기사 등록일: 201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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