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시사 칼럼) 91주년 3.1절을 맞으며
깊은 겨울, 독립의 봄을 기다린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9년 후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올해가 국치 100년, 기미 독립운동 91주년 되는 해이다. 그리고 광복 65주년 되는 해다. 외세의 침략을 벗어난지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피부로 느끼는 독립은 요원하다. 강제징용, 위안부문제 등 아직도 미해결 된 부분이 있다.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 국적회복이 겨우 작년에야 해결된 것은 아직 우리의 독립이 미완성이란 증거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국가반역자 재산은 척척 잘 찾아주면서 독립운동가 재산 찾아주는데는 인색한 현실도 진정한 독립이 요원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안동출신 독립지사 김세동이 대표적 예다. 그분은 대대로 물려받은 강원도 태백의 야산에서 무기를 만들고 독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고 신흥무관학교에도 보냈다. 그러다 일제의 검거되 징역을 선고받고 재산은 빼앗겨 국고에 귀속되었다. 해방 된지 65년이 지났지만 후손들은 아직도 국고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법원이 친일파, 국가반역자 후손들의 재산권 청구소송에서 패소판결을 내고 단재 신채호 선생 국적이 회복된 것은 그나마 지난 10년간 빨갱이(?)정권이 집권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91주년 3.1절을 맞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갔다. 광복 15주년이 되는 1960년 3.1절은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스코필드 박사가 있었다

50년 전 3.1절 인터뷰
3.1운동의 산 증인은 말한다
-스코필드 박사의 회고담-
3.1정신 모를 사람들의 행사는 무의미

기미만세운동의 산 증인 일뿐 아니라 반세기간에 걸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캐나다인 ‘스코필드’박사는 작년 9월 이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미생물학 교수로 있으며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또 자기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또한 너무나 많은 한국에서 일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자기가 ‘바른말 한다는 이유로 뜻밖의 대접을 받는 것은 딱한 노릇’이라고 한국의 지나치게 예민한 정치감각을 민망해 하면서 이는 요즘 사람들이 3.1운동 당시의 ‘영웅적 저항정신’을 잊고 안이한 ‘무사주의자’가 되어 있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사악(邪惡)을 용허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어두운 것”이라고 부른 셸리의 시를 상기 시키면서 사람들은 “안전제일주의를 벗어나서 진리제일주의를 믿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고 3.1운동 당시의 한국사람들은 사악을 미워하고 물리칠 용기를 잃지 않았는데 “요즘의 한국인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지금은 부인도 여의었고 여가와 돈이 있으면 자매이카의 친지를 찾거나 독일이나 덴마크의 벗을들 찾아 보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그는 불편한 다리를 끌며 낮에는 서울대학교와 세브란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밤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40-50명의 남녀대학생들을 상대로 ‘한국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지낸다고 한다.

그는 거듭 “당신이 제일입니다” “지당하옵니다”식으로 남에게 아부하는 습성이 우리나라 에 만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젊은이들 가운데 믿음직한 일군들이 많고 그들은 지위와 재산을 위해서 어쩔줄 모르는 겁쟁이들을 미워할 줄 알고 잇어 마음이 듣든 하다고 말한다. 특히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그들을 이겨내는 길은 부패를 막고 건강하게 뻗어나온 양식에서 찾아야 할것이며 거룩했던 3.1저항정신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식전을 아무리 성대히 차려놓아도 그것이 무의미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3.1운동 당시 세브란스 병원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만세를 부르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또 여러 역사에 남을 장면들의 사진도 찍고 한 이 외국노인의 호의의 비평을 받아들일 관용과 그런 비평이 다시 나오지 않게 하는 결의가 있어야 하겠다는 느낌이 하직하는 기자의 머리에 감겼다. (1960년 3월2일 동아일보에서 발췌)

41주년 3.1절을 맞은 1960년은 이승만 독재의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코앞에 두고 맞은 3.1절이었다. 민심은 등을 돌렸건만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정권을 유지하려 했고 스코필드 박사는 입바른 소리해서 이승만정권의 미움을 단단히 받고 있었다. 1970년 타계한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묻혔다.
지금은 이명박정권과 한나라당 기관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동아일보가 당시에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 싸우는 신문이었다는 사실에 금석지감을 느낀다.
원로보수우익 이철승, IMF주인공 김영삼이 이때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오충근 기자)

기사 등록일: 2010-03-04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연방치과보험 드디어 5월 1일 ..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캘거리 부동산 시장, 2024년..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캘거리 22세 남성, 아내 살해..
  캐나다 금리 인하 임박…연말 4..
댓글 달린 뉴스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