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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발해, 천암함과 남, 북 관계 _ 오충근의 시사 칼럼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 시킨 것이 660년, 고구려를 멸망 시킨 것이 668년, 그러나 고구려는 나당연합군 이라는 외부에서 가해진 물리적인 힘보다 내분으로 자멸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삼국통일로 우리 민족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삼국시대가 정립되면서 삼국은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립하며 극복해야 할 상대이었지만 미미하나마 역사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공동체의식은 부족연맹, 부족국가 시대인 삼한시대부터 있어 온 것이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구체화되어 민족국가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동일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삼국통일 후 외세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더욱 공고히 되었다. 당은 백제, 고구려 영토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경주에도 총독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실질 지배하려 했다. 그래서 당은 신라왕을 계림도독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 고토에 몰락 귀족, 왕족을 내세워 대리 통치를 하려 했다.

삼국의 주민들은 백제 고구려 따지지 않고 당이라는 외세를 축출하는데 하나가 되었다. 9년에 걸쳐 우리 민족은 외세를 축출하는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민족의 동질성 확보라는 부수적 효과를 얻었다. 언어, 문화, 역사, 정치, 경제 등 전반에 걸친 동질성 확보는 삼국 통일의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평양-원산을 경계선으로 그 이남만을 영토로 갖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약소민족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직접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 고토를 중심으로 현재 동북 3성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 건국한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과는 긴장적 관계를 바탕으로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 일본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는 우호적 관계보다 적대적 관계일 때가 더 많았고 신라는 발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신라 원성왕, 현덕왕 때 발해에 사절을 보내는데 이것은 국내정치 전환용이었다. 국내 정치적 발판이 약하니까 외교를 통해 만회하자는 생각이었다.

당도 마찬가지로 발해, 신라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다. 819년 이사도와 전쟁을 할 때 당은 신라에 파병요청을 해 3만명을 파병했다. 장보고도 그 즈음 참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사도의 할아버지 이정기는 고구려 출신 유민으로 산동반도 일대에 왕국을 이뤘다. 산동반도 일대를 중국에서는 제(齊)라고 하는데 이정기를 제왕(齊王)이라고 불렀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죽었을 때 중국 역사서(자치통감, 구당서)에서 죽었다는 일반적인 말 졸(卒)이라 하지 않고 왕이나 황제가 죽었을 때 쓰는 용어인 훙(薨)이라 표현한 걸로 봐서 공식적인 왕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 때 당은 이사도와 전쟁을 하는데,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를 치는데 신라에게 파병을 요청한 것은 요즘 말로 한다면 ‘발해의 염장을 지르는 것’이었다. 파병사건으로 발해-신라는 한 때 최악의 긴장관계가 유지되었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침입하자 당은 신라에게 이번에는 발해의 남쪽을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다. 즉 발해의 뒤통수를 치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라는 발해를 의식해 826년 국경에 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발해-신라가 적대적 긴장관계만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신라도 라고 신라 천정군(함경남도 덕원)-발해 책성부(길림성 혼춘)를 잇는 길이 있었다. 이 길에는 39개의 역참이 있었다 하니 왕래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양국은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발해-당 도 항상 긴장관계만 유지한 것은 아니다. 발해는 766~779년까지 13년 간, 무려 143회에 걸쳐 당으로 공식사절을 보낸 기록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이해득실에 따라 우호관계, 긴장관계, 혹은 적대관계가 반복 될 뿐이다. 오늘은 동맹이었지만 내일은 알 수 없다.

발해가 국력이 쇠퇴해 거란족의 침입을 당할 때 발해는 신라를 비롯해 후삼국에 구원병을 청해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정세나 후삼국이 처해 있던 상황을 볼 때 발해에 군사적 도움을 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발해가 멸망할 때 결과적으로 이들은 묵인 방조한 꼴이 되었고 그것이 우리가 북방역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오늘날 중국이 조 단위의 돈을 퍼부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 발해 역사를 중국 변방사에 포함 시키려는데 이르렀다.

천안함 사건으로 본국에서는 물론 해외교포들도 둘로 갈라져 갑론을박 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그 동안의 평화, 우호관계에서 긴장, 적대관계로 변해 오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긴장, 적대관계로 돌아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태에서 서로 전쟁운운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제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북 긴장, 적대관계 자국 입장을 강화하며 자국 이익에 이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마치 발해-신라의 관계를 자국 이익에 이용하던 당나라, 일본, 토번(티베트), 거란처럼.

천안함 사건으로 상처를 입는 것은 결국 남, 북한의 우리 동포들뿐이다. 남-북 긴장관계를 조성해 정치,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남, 북한의 일부 계층 빼고 우리 서민들 말이다.

국제공조라고 하지만 영원한 동맹은 없다. 국가, 민족은 영속성이 있지만 동맹이나 이념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 서인들처럼 명나라를 영원한 동맹으로 알았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사실을 생각해 보라.

해외교포들 조차 천안함 사건을 둘러쌓고 둘로 갈라져 좌파 우파 찾지만 좌파 우파라는 이념이 절대적인 것 아니고 영원한 가치도 아니다. 성리학이 영원한 이념인 줄 알고 세상 달라지는 것도 모르고 성리학에 연연하다 나라 말아먹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보라. 민족과 역사를 잃어버리고도 좌파 우파 찾겠는가?


기사 등록일: 201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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