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상기하자 6.25 -전쟁의 추억-
최근 미국 종군기자들이 6.25 전쟁 당시 찍은 보도사진들이 공개했다. 사진은 머리와 어깨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진 어머니가 굶주림에 지쳐 흙 바닥에 쓰러진 어린 딸을 일으켜 세우는 장면

6.25만큼 다양한 호칭을 가진 전쟁이 있을까? 남한에서는 6.25사변, 6.25전쟁, 한국동란, 한국전쟁, 6.25동난 등으로 부르고 있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으로,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 미국에서는 The forgotten war, The unknown war라고도 한다.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6.25동난, 6.25사변이라고 배워 그런 표현이 편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전쟁의 기억이 생생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조회시간에 ‘공산도배를 무찌르고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는 그날까지’라는 교장선생님 훈시를 들으면서 자랐고 심지어 여자애들 조차 동네에서, 학교에서 고무줄 넘기 놀이를 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을 부르며 공산도배에 대해 적개심을 품으며 자랐다.

무찌르자 공산당(혹은 오랑캐) 몇 해 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길이 정의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6.25사변은 남, 북한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남한이 입은 피해는 군 전사자 227,800명, 부상 717,000명 민간인 사망자 350,000명 부상 290,000명이고 북한 피해는 군 사망자 520,000명 민간인 사망 및 실종 2,000,000명이다. 남한의 피해는 개전 초기에 집중 되었고 북한은 개전 초기를 제외한 전 기간 걸쳐 장기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원인-
6.25사변이 다양한 호칭을 갖고 있듯 전쟁의 원인도 다양하다. 스탈린 주도설, 한미 공모설, 내전 확전설, 심지어 북침설도 있다. 허풍과 기만에 가득 찬 이승만 정권의 총참모장 채병덕은 허풍정권의 총참모장답게 인민군을 격퇴하고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허풍을 떨었는데 그 말을 사실로 들은 미국은 북침 못하도록 장비를 철수 시켜 6.25 초기에 고전한 원인이 되었다.

다양한 원인과 가설이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손으로 해방을 못하고 남의 손에 해방 된 것에 있다. 외세에 의해 해방 되 북쪽엔 소련이 남쪽엔 미국이 진주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두 번 째 원인은 김일성에 있다. 남 북한에서 벌어지는 국제, 국내 상황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결심하게 하였다. 국내 정치적 기반도 없던 김일성은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아 군사력이 북한에 비해 취약했고 남한을 방어선에서 제외시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미국의 이런태도는 남침유도설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국내외 정세를 감안한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고 중국의 지원을 확인한 후 남침을 결심하게 되었다.

-전쟁이 주는 교훈-
전쟁의 와중에서 왜 죽는지 모르고 죽어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억울한 죽음 중에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죽음이 있다. 최대령은 28일 새벽 2시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전화로 한강교 폭파지시를 받고 2시30분 경 폭파했다.

그리고 그 해 9월21일 최대령은 ‘적정 확인임무 불이행’ 과 ‘적정 비행죄’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강다리 조기폭파에 따른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이승만 정권은 고작 육군 대령에게 모든 책임을 씌워 희생양을 삼아 면피에 성공했다. 국방장관 신성모, 차관 장경근은 한강다리 폭파 명령 내린 적 없다고 오리발 내밀고 명령을 내린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해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전시에 군인이 상관 명령에 따랐다고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런 군대 조직이 유지 되겠는가? ‘나는 억울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당한 최대령은 14년이 지난 196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했다.

한강다리 폭파와 서울 사수한다고 방송국에 녹음해 놓고 도주한 이승만의 행위는 정부 수립한지 2년밖에 안되 체제가 엉성하고 기강이 잡혀있지 않다고 하지만 국가원수라고 하기엔 민망하기 짝이 없다.

12.12군사반란 때 국방장관 노재현이 이리저리 피신해 다닌 행적이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데 명색이 국가원수가 국민 속이고 서울 빠져나가 수원 그리고 대전, 대전에서 대구,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또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 다시 대구로 7월9일까지 이어진다. 그 와중에 ‘성남장 사건’이 일어났다.

수원에서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고 각료들은 대전 성남장 이란 여관에 숙소를 정했는데 북한군이 평택까지 내려왔다는 소리에 각료들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전주로 피신했다. 그러다 평택까지 내려왔다는 게 오보로 알려지자 이들은 다시 성남장으로 돌아왔다. 성남장 주인 김금덕 여사는 이런 각료들 행동에 분노하며 “대한민국을 망치는 건 김일성이 아니라 당신 같은 자들”이라며 투숙을 거부했다.

정부는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이었으나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한 것은 국민들이었다. 일전에 작고한 원로가수 백설희가 부른 ‘아내의 노래’처럼 수많은 아내들의 남편이, 무수히 많은 젊은 여자들의 애인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총살당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부인 옥정애 여사도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가 없이 우리를 도운 16개국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부유한 국가도 있지만 필리핀, 태국, 인도 심지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도 우리를 도왔다. 지금은 우리보다 가난하다고 그들을 멸시하고 얕보는데 그러다 천벌 받는다. 이제 우리도 밥술께나 먹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젠 우리가 그들을 도울 차례다.

춘추전국시대 병법의 대가로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자는 손자병법 시계편에 “전쟁은 국가 존망이 걸려있고 병사들의 생명이 걸려 있으므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면서 전쟁의 본질을 논하고 결론으로 “싸워 이기는 것은 최하책이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했다. 6.25 사변 60주년에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기사 등록일: 2010-06-24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캘거리 부동산 시장, 2024년..
  연방치과보험 드디어 5월 1일 ..
  “주택정책 너무 이민자에 맞추지..
댓글 달린 뉴스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