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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8월, 해방의 달
- 역사의 신을 믿으라, 선과 진리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

우리 한인들에게 8월은 광복의 달, 해방의 달이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의 기쁨도 있지만 조국 분단이라는 아픔도 있다. 우리의 독립은 이미 카이로선언에서 확인되어 국제적으로 보장 받았고 그 후 포츠담회담에서 우리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26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 결과를 일본에 통보하며 연합국은 일본에게 포츠담회담 수락을 촉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그 결과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우리의 해방이 국제사회에서 결정되었지만 해방을 위한 우리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노력한 수많은 선열들 중에 8월에 생각나는 인물이 김준엽 선생이다.
지난 6월7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준엽 선생은 고려대 총장에 재직 중 군사정권에 의해 총장직에서 파면 당할 때 학생들이 “총장 퇴진반대”를 외친 유일한 총장이다. 대개 군사정권에 협조하는 총장을 물러나라고 하는 게 보통인데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선생은 90평생을 군인으로, 학자로, 독립운동가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훈장을 받았으나 85년 학생들이 벌린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최고의 훈장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준엽 선생은 박정희 정권 때 부터 시작해 정권이 바뀔때마다 관직을 제의 받았으나 한번도 관직을 맡은 적이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도 총리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내가 총리가 되면 전두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관직을 맡은 적이 없는 선생은 평생 생일상을 따로 받은 적이 없었다. “생일상을 받을 생각을 하면 일제치하에서 고생하던 일이 생각나 생일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2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제말기 학도병으로 입대할 때 “일본군에서 탈출해 독립군에 합류해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겠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입대했다. 전시에 탈영은 총살이다.
그러나 선생은 아예 총살 당할 각오를 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입대해 반드시 독립군을 찾아가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결심했으니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천황에게 혈서까지 쓰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다가키 마사오라는 조선 청년과 비교가 된다.
중국 서주에 주둔한 츠카다 사단 경비중대에 배속된 선생은 한달 4일만에 부대를 탈영해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했다. 학도병출신 탈출병 1호다. 어찌나 철저하게 탈출 준비를 했는지 탈출 4시간만에 유격대를 찾아갔다. 유격대를 제발로 찾아가 말이 안 통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유격대에서는 종이에 “환영 조선혁명지사”라고 쓰며 선생을 반겼다.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중에 장준하 형의 말을 들어보니 탈출하는데 나 보다 몇 배 고생을 했다. 내가 탈출 4시간만에 유격대를 찾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입대전 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까닭이다. 용의주도한 계획과 준비, 과단성 있는 행동은 그 후 내가 살아가는데 행동원칙이 되었다.”
중국군 유격대 시절 역시 학도병 입대해 탈출해 유격대에 합류한 평생동지 장준하선생을 만났다. 장준하 선생은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 등 4명이 동시에 탈출했다. 김준엽, 장준하는 이때부터 자준하가 세상을 떠나는 75년 8월까지 연인처럼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중국군 유격대에 소속된 이들 학도병 출신 탈출병들은 일본 군복 대신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거머리처럼 지긋지긋한 일본 군복을 벗어버리고 중국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독립군 군복을 입은 것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동맹군인 중국 군복을 입으니 왜색(倭色)에서 벗어난 것 처럼 상쾌했다.”
중국 유격대에 소속되었던 5명의 탈출병들은 사령부에 청원에 독립군을 찾아갈 것을 허락 받았다. 서주에서 임천, 임천에서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까지 6천리 길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중경에 도착해 꿈에 그리던 독립군이 되어 일제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독립군인 광복군이 탄생한 것은 1940년 9월17일 중경에서였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한 1910년 부터 만주에서 무력항쟁을 시작한 독립군은 단일 지휘계통없이 단위조직별로 항쟁을 했다. 더구나 민족주의계열, 공산주의계열로 나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중경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의 주도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탄생했다. 총사령에는 이청천 장군이 취임하였다. 이날 광복군 창설식에서 이청천 장군에게 광복군기를 헌기(獻旗)한 사람이 당시 17세 소녀 민영주로서 민영주는 나중에 김준엽 선생과 결혼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영토에서 무장활동을 하는만큼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었다. 또한 장비, 경비, 물자, 교육등 모든 것을 중국에 의지하는 만큼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 9개 행동 준승’을 마련해 광복군을 통제했다.
그러나 9개 준승은 광복군의 자주성과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9개 준승을 차차 고쳐나가기로 하고 9개준승을 받아들였다. 그후 임시정부는 꾸준히 중국측과 교섭한 결과 광복군을 임시정부에 귀속시킨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군에서 파견되었던 참모들은 중국군으로 복귀하고 광복군에 소요되는 군비는 임시정부가 중국정부로 부터 차관 형식으로 제공 받았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중국에서 셋방살이 하며 중국의 원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중국군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군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임천을 떠난지 73일, 일본군에서 탈출한지 10개월만에 김준엽 일행은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겨울이었으나(1월31일) 늦은 봄처럼 따뜻한 날씨에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으나 땀이 흐른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군복에 태극기를 그린 마크를 단 일행은 이열종대로 행군해 정부청사에 도착했다. 건물 위에 한글로 커다랗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쓰여 있었고 꼭대기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일행은 눈물을 글썽이며 도열해 정성을 다해 태극기에 경례를 했다.

기사 등록일: 20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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