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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교훈-기행문 _ 이명희 (캘거리)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유타주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에서  
돈 쓰는 데는 벌벌 하지만 한국경제에 일조했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베이비 부머 네 명이 미국 서부를 돌기로 했다. 기간은 한 달을 잡았다. 심장이 떨릴 때 못 가고 다리가 떨릴 때 여행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패키지로 다녀온 곳이지만 칠십 평생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오빠 부부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벌인 일이다. 오빠는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패키지여행만 다녔다. 검소함이 몸에 배어서다. 몇 년 전부터 오빠 부부에게 장거리 자유여행을 가자고 했다.
시차 적응이 되면 가까운 곳부터 출발해서 트레일러를 떼놓고 2박부터 시작하는 일정이다. 예약은 몇 달 전에 해 놓았다. 덩어리 하나를 SUV 4Runner에 달고 운전은 남편이 하니 세 명은 남편을 왕으로 모시기로 했다.

첫 번째 여행지는 해발 2,036m로건 패스까지 도달하는 거대한 자동차 도로로 하늘이 닿을 듯한 곳으로 고공행진 하는 글레이셔 국립공원이다. 천 길 낭떠러지의 고소공포증 때문에 숨이 멈출 것 같아 결국 눈을 감고 말았지만, 오빠 부부가 스릴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영화 속 장면을 현실에서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 장소는 화산이 폭발해 곳곳에서 용암이 끓고 있는 옐로우스톤이다. 두 분이 어찌나 신기해하는지 연방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보낸다. 이 장소는 남매가 구경하는 도중 금지구역을 무시한 오빠가 유황 못에 빠져 형체를 찾을 수 없던 장소라고 알려 주었더니 오빠 부부는 겁에 질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날씨가 하도 쾌적해 앞으로 일어날 고난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랜드 캐니언으로 이동했다. 여행 출발부터 남편의 기침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오빠와 나도 기침하기 시작했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더위는 살인적이다. 자동차에 매달린 트레일러는 운전 시간을 배로 증가시키고 기름 먹는 하마는 하루에 두세 번씩 주유를 원했다. 출발할 때마다 하마에게 밥을 주자고 했건만 괜찮다며 남편이 우겼다.
미터기가 간당간당할 때마다 차가 멈출까 봐 피가 말랐다. 남편은 심기가 불편한지 이유 없는 고집을 부렸다. 폭염에 이동 장소까지 하루 7시간 이상 운전하는 남편 앞에서 우리는 죄인처럼 눈치만 보았다.
밤이 되면 오라버니와 나의 기침으로 좁은 공간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밤에 숙면을 못 하니 오빠 부부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내내 졸았고, 운전만 하는 남편은 짜증과 예민함이 도를 넘어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남편은 뒷짐 지고 있는 오빠가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오빠 때문에 주눅 든 올케언니와 나는 두 남자 사이에서 눈치 보랴, 분위기 맞추랴 마음이 내내 지옥이었다. 남편의 감기는 나았어도 우리는 에어컨을 틀지 못한 채 한증막 속에서 여행을 강행했다.

최악의 장소 ‘라스베이거스’ 호텔비가 왜 이리 싼지 도착해서야 알았다. 45도를 넘나드는 여름에는 이곳에 오는 게 아니란다. 몸이 따가워 몇 초도 서 있을 수 없어 호텔로 잠자리를 바꾸면서 드디어 일이 터졌다. 출발할 때 의기충천했던 오빠가 집에 갈 날만 손꼽기 시작했다. “언제 도착이냐?” “아직 멀었냐?” 심지어 올케언니에게 “감기도 걸리지 않는 센 여자야!”라며 조롱하였다. “트레일러가 이렇게 좁은 줄 몰랐다.” “먹는 건 아무거나 먹어도 잠자리는 제대로 돼야.”라며 계속 불만을 터트렸다.

초등생이 아니라 중2병이다. 이제야 닭장같이 좁은 트레일러의 열악함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행자들이 트레일러를 집채만 한 걸 끌고 다닐 때, 속 좁은 나는 트레일러의 크기는 곧 부의 상징이라 그들이 과시한다고 생각했다. 트레일러 안이 쾌적해야 하는 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야영장 이웃들이 “너희 넷이 그 안에서 잤니?”라며 신기해할 때마다 속된 말로 ‘쪽팔려’ 창피하기까지 했다. 우리 수준에 맞는 것을 준비한 건데 오빠 부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즐거운 여행이어야 될 판에 어떻게 마무리할지 정신적 부담과 갈등이 몰려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남편이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행 일정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며 두 분을 비행기로 집에 보내 드리자고 했다. 야영장은 선급을 마쳤으니 두 분만 집에 가 계시면 우리는 트레일러를 끌고 예정대로 도착하겠다고 했다. 두 분이 펄펄 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우리만 떼놓고 가면 안 돼!” “참아 볼게.” 우리는 고민을 했다.
그렇다고 열흘 이상 고생하며 사막 지역을 되밟아 갈 수는 없었다. 오빠의 불만이 조용히 수그러든다. 할 수 없이 여행지 두 곳을 취소하고 여행 일정을 줄이기로 했다. 뒷짐만 지던 오빠가 남편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오빠와 티격태격하던 언니가 오빠와 화해하고 예민했던 남편도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여행은 이번으로 끝이야!’ ‘내 오지랖도 끝이야!’ 이를 갈며 다짐했던 상처투성이 마음이 아물기 시작했다.

LA에 도착해서야 칠순 소년과 미소년이 미소를 되찾았다. 애들처럼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온종일 미래 과학 상상 체험을 만끽할 때는 나이를 잊은 채 체험장을 누비고 다녔다. 기다리지 않고 통과하는 특별 패스권이 비싸다고 못마땅해하던 표정도 사라졌다. 외식도 입장료도 비싸다는 오빠 부부에게 “여행하러 와서 주머니를 움켜쥐면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 돈 쓰는 것은 내 소관이다.”라고 남편이 으름장을 놨다.
비싼 관람권이 중국의 두 배라고 기함하던 오빠 부부. 나 또한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쇼를 봐도 C석이었지 상등석엔 앉아보지 못했었다. 우리는 VIP가 되어 그동안의 더위와 열악한 잠자리를 보상받았다. 시애틀에 와서야 두 남자는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정리하고 염색으로 단장했다.

누가 봐도 여독의 티가 나지 않았다. 십 년은 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긴 여정에서의 다툼과 갈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미소로 여행의 목적을 되찾았다. 우리는 미국 일정을 마치고 여유 있게 캐나다 국경을 넘어왔다.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해졌다.

여행 중 전송한 사진을 보고 “삼촌이 많이 늙으셨네요!”라고 아들이 전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지, 네 명 다 무사해서 감사할 뿐이야.” “삼촌도 칠순이 되었으니 예전 같겠니.” 나는 탈 없이 집에 도착한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에 도착한 오빠가 늙어 보이기는커녕 더 쌩쌩해 보였다. 여행 끝에 찾아온 대범함이랄까, 오히려 여행계획을 세웠던 내가 폭삭 늙어 보였다. 여행하고 와서야 깨달은 것이 있다.

여행은 형제애나 개인적 열정만 있어서 될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신이 아니면 서로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트레일러 속에서 짐이 끝도 없이 나오니 딸애가 말한다. “몇 달은, 더 다녀오셔도 될 것 같은 대요?”라고. “그럴까?”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정말 다시 떠나도 될 만큼 성숙해진 것 같다.
불편해도 참을 줄 알고, 배려할 줄 알게 된 철없는 어른들. 여행하면서 윗사람이라고, 남자라고, 여자라고, 대접받으려는 것보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 25일간의 여행이었다. -2017년 기행-



*그 후 트레일러를 업그레이드하고 캐나다 동부를 한 달 다녀왔다.

기사 등록일: 202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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