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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 2_ 간략한 기독교 역사 18
. 칼케톤 종교회의 이후의 동방교회 칼케톤 종교 회의의 결론은 기독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특히 동방에서 심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교회는 칼케톤 회의의 결론에 대하여 반대하였는데, 그들의 신학적 반대는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더욱 가열 되었다. 왜냐하면 중앙 정부는 각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대신 이에 상응한 혜택을 베풀어 주지 않았기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로마 정복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존재하여 그 후 해소되지 못했던 문화적, 인종적 갈등의 요인이 첨가되었다. 이렇게 반감(反感)을 가진 주민들의 충성을 얻기 위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들 뿐만 아니라 칼케톤 회의의 결정을 찬성하는 인물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신학적 타협책들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양측의 갈등은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들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칼케톤주의자들과 반대 측의 사이를 더욱 더 커지게 만들었고, 교회 내에 끝없는 논쟁만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정치로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더 큰 혼란 가운데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칼케톤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충성심을 회복하고자 시도하였던 마지막 황제는 7세기 초의 헤라클리우스(Heraclius)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세르기우스(Sergius)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의지는 오직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단일의지론"(monothelism)이라고 알려진 세르기우스의 입장은 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의 지지를 받아 그 후 오랜 논쟁이 지속되게 되었다. 때마침 아랍인들의 정복이 시작되어 시리아와 이집트가 함락되었다. 바로 이 지역에서 칼케톤에 대항한 반대 의견들이 가장 강력하였으므로, 황실의 정책은 더이상 반칼케톤주의자들을 회유하고자 하지는 않게 되었다. 648년 콘스탄스 2세(Constans Ⅱ)는 그 후 일체의 그리스도의 의지, 혹은 의지들에 관한 논쟁을 금지하였다. 결국 680-6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6차 세계 종교회의에서 '단일의지론'을 정죄하고 호노리우스 교황은 이단이었다고 선포하였다. 이 때문에 그 후 19세기 "교황 무오설"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황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동방의 분파 교회들 비록 여러 공의회의 가르침은 동·서방 제국의 영내에 있던 교회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제국 경계의 밖에 있던 교회들도 모두 이에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는 페르시아의 교회였다. 전통적으로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의 적수였으므로, 이곳의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이 기독교를 신봉한다고 해서 반드시 로마 제국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잔인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410년에 페르시아 교회는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페르시아 수도였던 크테시폰(Ctesiphon)의 총대주교를 교회의 지도자로 옹립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자 안디옥 학파를 따르던 일단의 신학자들은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에 도피했고, 이곳에 페르시아 내의 신학 교육의 중심지가 된 학교를 세웠따. 그 결과 다른 기독교 신자들은 페르시아 교회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규정했다. 이 교회는 전성 시대는 아라비아, 인디아, 그리고 중국에까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 수가 점차 감소하게 되고, 현재 남아 있는 수천 명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 이디오피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디오피아 기독교의 창립자인 프루멘티우스(Frumentius)와 에데시우스(Edessius)는 이디오피아 근방에서 파선(破船)하여 이디오피아인들에게 사로잡혔다가 해방되었던 인물들이다. 프루멘티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아타나시우스의 손에 감독 임명을 받고 이디오피아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주로 이집트에서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선교한 끝에 왕과 아울러 많은 국민들을 개종시켰다. 칼케톤 회의에서 디오스크루스 및 기타 알렉산드리아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을 때에, 이디오피아 신자들은 이집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동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단성론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소위 단성론주의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3. 동·서 교회의 분열 불가리아 대주교인 '오크리드의 레오'(Leo of Ochrid)는 서방 교회가 성직자들의 독신을 보편적 법규로 강요하고, 무교병을 성찬식에 사용하는 것 등이 오류라고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분쟁이 더욱 가열되자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때 레오는 가장 부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가 뽑은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는 헬라어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이를 배우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성직자들의 독신주의를 열렬히 지지하고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교회의 독립을 골자로 하는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동방 교회의 결혼한 성직자들과 비잔틴 황제가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권한이야말로 그가 쳐부술 것을 맹세한 대적들이었다. 그와 미카엘켈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총대주교는 야비한 언사로 서로를 모욕하였다. 마침내 1054년 6월 16일 총대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훔베르트 추기경이 성 소피아 성당에 나타나 중앙 제단 앞으로 걸어가 그 위에 교황의 이름으로 - 교황은 실상 이 사건 직전에 사망하였다 - "이단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 및 그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보고문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성당을 걸어 나와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린 후 로마를 향해 떠났다. 마침내 동방과 서방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5/20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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