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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과 교황권의 타락_간략한 기독교 역사 20
1. 신성로마제국 서기 800년 성탄절 날, 교황 레오 3세는 나중에 '샤를마뉴'라고 불리운 프랑크 왕국의 왕 찰스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얹으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하나님이여, 위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황제에게 만수무강을 허락하소서." 레오가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내렸을 때, 단지 브리튼 제도(諸島) 및 아랍인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일부 스페인만을 제외하고는 서방 기독교권 거의 전부가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샤를마뉴는 황제로서 스스로의 권위가 세속 정부 및 종교 문제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유능하고 자격 있는 자들을 선별하기는 하였으나, 마치 장군들을 임명하듯이 감독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교회에서 설교를 행하도록 하고, 주일을 예배와 휴식을 위한 날로 지정하며, 마치 세금을 징수하듯이 십일조를 걷도록 하는 법률들을 마련하였다. 당시 수도원은 이미 원래의 경건과 열정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 많은 수도원장들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탐하였으므로 샤를마뉴는 전체 수도원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고위 관직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시 지혜와 경건에 있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아니안의 베네딕트(Benedict of Aniane)에게 이 과업을 맡겼다. 아니안의 베네딕트는 곧 샤를마뉴의 영역 내에 있던 수도원들을 원래의 베네딕트 규율에 의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카롤링 왕조 시대에 발생한 중요한 논쟁은 "성찬식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문제"였다. 이러한 논쟁을 낳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코르비(Corbie)의 수도사인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의 저술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라는 논문이었다. 라드베르투스는 이 논문에서, 떡과 포도주는 성화되는 순간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이들은 더 이상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바로 그 몸이며 갈보리에서 흘렸던 바로 그 피라는 것이었다. 라드베르투스에 의하면, 비록 이러한 변화가 신비스럽게 발생하고, 보통의 경우 인간들은 감각으로 이를 깨달을 수 없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신자가 떡과 포도주 대신 주님의 몸과 피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된다고 하였다. 샤를마뉴의 손자이며 당시 국왕이었던 대머리 찰스(Charles the Bald)는 라드베르투스의 논문을 읽던 중 이에 관해 의문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코르비의 라트람누스(Ratramnus)에게 이 문제를 명백히 밝히도록 부탁하였다. 라트람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속에 진정으로 임재하지만 이는 다른 물리적 육체의 임재와는 다른 종류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성체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예수님의 역사적 몸과는 다르다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살펴볼 때, 카롤링 시대에 이미 성찬식을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한 인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당시 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평범한 신자들의 과장이 빚어낸 결과이며 정확한 신학 용어의 사용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후 얼마 안되어 일부 신학자들은 "본체의 변화"(change in substanc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13세기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1215년)에서는 화체설(化體設)을 선포하게 된다. 2. 교황제의 타락 샤를마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후, 교황청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교황은 황제를 임명할 권리까지 가졌으나, 로마 제국 안에서 발생하는 혼란 때문에 제대로 통솔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교황의 자리는 뇌물, 음모, 그리고폭력까지도 사양치 않는 야망에 가득한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제국의 권위가 약화됨에 따라 교황들이야말로 서부 유럽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막강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간주되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니콜라스 1세와 하드리안 2세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통치하였다. 하드리안 2세가 로렌(Lorraine) 왕 로테르 2세(Lothair Ⅱ)와 충돌하였는데, 왕이 성찬을 받기 위해 몬테 카시노에 나타났을 때, 교황은 왕과 그의 신하들을 저주하였다. 곧 왕의 궁정에 심한 전염병이 발생하였으며, 이 때 로테르가 사망하였으므로 교황에 대한 외경심은 한없이 높아져갔다. 그러나 다음 교황인 요한 8세 때부터 권위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뚱뚱보 찰스(Charles the Fat)와 비잔틴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교황은 자기의 궁정 안에서 살해 당하였는데, 그에게 독을 먹였던 비서는 교황이 빨리 죽지 않는 것을 보자 망치로 그의 머리를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 그후 교황들은 제대로 재위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계속 교체되었다. 로마 시내에 있던 서로 다른 당파들과 알프스 산맥을 건너 존재하던 유력한 가문들이 교황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계속 투쟁하였으므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음모와 잔학 행위가 자행되었다. 교황들은 목졸려 죽기도 하고, 혹은 그 자리를 찬탈한 자들에 의해 유폐된 지하 감옥 속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둘 혹은 셋 이상의 교황들이 존재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897년 스테픈 6세는 나중에 역사가들에 의해 "시체들의 회의"(Cadaveric Council)라고 불리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통해 그의 선임 교황 중 하나였던 포르모수스(Formosus)의 시체가 발굴되어 교황의 예복이 입혀진 채 거리에 전시되었다. 그 후 시체에 대한 재판을 엵고 여러 가지 제목을 걸어 유죄를 선언하였다. 그 시체는 갈기갈기 찢기었고 남은 부분은 티베그 강에 던져졌다. 마침내 독일의 헨리 3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는 그레고리 6세와 회견한 후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새 교황들을 모두 퇴위시킨후 클레멘트 2세를 교황에 지명하였다. 종교회의는 또한 교회 내의 부정 부패, 특히 성직 매매를 반대하는 일련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클레멘트 2세는 헨리를 황제에 임명한 후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그러자 헨리는 이미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있던 토울(Toul)의 감독 부르노에게 교황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부르노는 로마 시민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한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와 비슷한 이상을 품고 있던 힐데브란트(Hildebrand)와 훔베르트(Humbert)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떠났다. 이들이 로마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교회를 위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5/27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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