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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종교개혁의 진행_간략한 기독교 역사 31
엑크와 칼슈타트 사이의 토론은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는데, 루터가 그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루터와 엑크가 대결하게 되었을 때, 루터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남이 금방 드러난 반면, 엑크는 교회법과 중세 신학에 보다 익숙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엑크는 자기에게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논쟁을 이끌어갔다. 루터는 콘스탄스 종교회의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오류라고 선언하였고,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 신자가 모든 교황이나 종교회의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고백하였다. 엑크는 이러한 대답을 받아낸 것으로 만족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종교회의에 의해 정죄 받은 이단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음을 선언한 셈이 되었으며, 감히 종교회의 자체가 실수를 범했다고 공격한 입장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엑크보다 월등하였던루터의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엑크의 승리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루터야말로 이단이며 후스의 교훈을 지지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개적인 대결로 인해서 루터의 새로운 투쟁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 전체 그리고 국경 밖에서도 루터야말로 성경적 신앙의 수호자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신학적으로 그에게 동조한 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루터를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는 독일인들의 대변자로 생각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교황 레오는 산돼지가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았다고 선언한 칙령(勅令, Royal decree) "엑스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을 통해 루터의 모든 저서들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칙령을 손에 받아 쥔 루터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교황의 잘못된 신조"들을 주장한다고 정의한 다른 책들과 함께 교황의 칙령을 함께 불태워 버렸다. 결국 각종 우여골적을 겪은 끝에 루터는 1521년 보름스(Worms)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 소환되었다. 보름스에서 루터는 황제 및 독일 제국의 대 영주들 앞에 서게 되었다. 제국의회는 루터에게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용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황제의 권력을 무서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전체 교회와 황제에 감히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행동이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수도사 루터는 24시간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의회가 개최된 장소에는 몰려든 군중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루터에게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느냐는 질문이던져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루터는 자기가 저술한 내용의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와 그의 대적들이 함께믿고 있는 기초적 기독교 교리이므로 아무도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황제인 찰스 5세는 루터의 가르침에 관해 학술적 논쟁을 벌이기 위해 그곳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다시 한 번 질문하였다. "그대는 철회하겠는가, 아니면 철회하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루터는 "독일어"로 대답하였는데, 독일어의 사용은 전통적 신학 논쟁에 사용되던 라틴어를 거부한 셈이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리고 나서 루터는 승리의 몸짓을 하며 회의장을 떠나 자기의 숙소로 돌아갔다. 루터는 교황의 칙령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리고 보름스에서는 자기의 이론을 철회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황제로서는 반항적인 수도사가 자기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으므로 루터를 처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루터를 '발트부르크 성'에 보호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12년(신약은 2년, 구약은10년)에 걸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성경의 독일어 번역은 종교개혁 운동 자체를 위해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와 나아가서는 한 국가로서의 독일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루터가 숨어 있는 동안에 개혁운동은 계속 되었다. 수도사와 수녀들이 수도원을 나와서 겨혼하였고, 예배의식은 단순화 되었으며,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와 각종 금식, 금욕일도 폐지되었다. 이러한 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는 루터란(Lutheran), 즉 '이단'을 박멸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대결, 슐레이만 황제가 이끄는 터어키인들의 침공 등으로 인해서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리고 국가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있던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들은 종교개혁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한 성경이 아니라 성령의 현재적 계시에 따라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토마스 뮌처(Thomas Munzer)"가 이끄는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전쟁의 결과 영주들이 승리하게 되었고 무려 십만 명 이상의 농민이 학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종교개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카톨릭 영주들은 루터주의야말로 반란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며 루터란의 증가를 방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또한 농민전쟁 때에 보여준 루터의 태도 때문에, 루터가 자기들을 배반했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다시 옛 신앙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 사이에 1523년 누렘베르크(Nuremberg)에서 다시 제국의회가 소집되어 교황과 황제가 보낸 대표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란을 향한 융화 정책이 결의되었다. 그리고 1526년에는 보름스 칙령을 철회했으며 수많은 독일의공국들이 각각 자기들이 선택하는 종교를 공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및 독일 남부 대부분의 영주들은 로마 카톨릭을 채택하였으며 다른 지방에서는 루터파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점차 종교적 모자이크화의 모습을 더해갔다. 이런회의 과정을 통해서 루터란들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저항하는 이들, 혹은 항의하는 이들"이라는 이름을 얻게되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황제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을 바꾸기를 요구하고 협박하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로 동맹할 때에만 소망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루터는 오랜 망설임 끝에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한 정당 방위의 무력사용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슈말칼트 동맹'(League of Schmalkald)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때에 국제 관계의 변화로 인해 찰스는 통일된 독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532년에 성립된 "누렘베르크 화의(Peace of Nuremberg)"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프로테스탄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것을 다른 영역에까지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협정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관할 영역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종교개혁의 불길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8/26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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