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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_간략한 기독교 역사
쯔빙글리는 루터의 출생 후 채 두 달이 되지 않는 1484년 1월 스위스의 산촌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삼촌으로부터 처음 글자를 깨우친 후에 당시 인문주의가 한참 성하고 있던 바젤(Basel)과 베른(Bern)에서 공부하였다. 그후에 비엔나대학교로 유학하였다가 글라루스(Glarus)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계속 인문주의적 학문에 전념하여 헬라어에 통달하게되었다. 이처럼 그가 목회적 의무와 인문주의적 연구에 계속 겸하였던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스위스 지방 대부분의 사제들은 무식하였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신약 성경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19년 취리히(Zurich)의 신부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루터처럼 번민과 고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부지런한 성경 연구, 그리고 마치 기독교인 양 성행하던미신에 대한 분노,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비판 정신의 결과였다. 쯔빙글리는 그의 뛰어난 설교, 경건, 그리고 학식을 통해 곧 취리히 신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면죄부 판매인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쯔빙글리는 시의회 정부를 움직여, 짐을 푸기도 전에 그곳에서 축출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찰스 5세와 교전 상태에있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스위스 연맹(Swiss Confederation)에게 파병을 요청하였을 때, 취리히는 이를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취리히가 교황청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란시스를 섬길 용병을 보내도록 시 정부에강요하였다. 쯔빙글리는 이 사건을 통해 교황청의 권력 남용을 실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독일에서는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감히 황제에게 대항하는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쯔빙글리의 적수들은 쯔빙글리의 가르침이 독일의 이단자인 루터와 동일하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쯔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의 가르침에 관해 알기도 전에 이미 성경 연구를 통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쯔빙글리는 종교 개혁은 루터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결과는 아니다. 이는 루터와 같은 시기에 이미 발생하였던 운동으로서 그후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존재를 발견하여 연계를 맺게 된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쯔빙글리가 활동하고 있던 취리히를 관장하였던 콘스탄스 주교는 취리히에서의 움직임에 점차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쯔빙글 리가 금식 및 금욕에 관한 교회법에 반대한 설교를 행하였을 때 그 결과로 그의 교구민들 가운데 일부가 사순절(Lent)에 한 곳에 모여 소시지를 먹은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콘스탄스 부주교는 쯔빙글리를 의회 정부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성경을 증거로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계속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당시 교회 개혁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으나 물론 루터나 쯔빙글 리가 주장했던 만큼 양보할 생각이 없었던 아드리안 6세는 여러 가지로 쯔빙글리를 회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자기가 주장하였던 성경에 기초한 개혁을 양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시의회 정부는 쯔빙글리와 감독의 대표자들 사이의 공개 토론 자리를 마련하였다. 쯔빙글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쳤지만, 주교의 대표자들은 쯔빙글리에게 응답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시의회는 아무도 쯔빙글리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지 못하였으므로 계속 설교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취리히는 콘스탄스 주교구와 결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로마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의회 정부의 지원 아래 취리히 종교 개혁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쯔빙글리의 최대 목표는 "성경적 신앙과 생활"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의 정확한 내용에 있어서는 루터와 달랐다. 왜냐하면 루터는 성경에 배치되지 않는 한 모든 정통적 모습을 계속 고수하고자 했는 데 반해, 쯔빙글리는 성경의 구체적인 보장이 없는 일체의 관습은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쯔빙글리는 음악을 즐기고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오르간 사용을 금지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악기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쯔빙글리의 감독 아래 취리이헤서는 급격한 변화들이 발생하였다. 2종 성찬 - 빵과 포도주 - 이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졌다. 수많은 사제들, 수도사들, 그리고 수녀들이 결혼하였다. 아무런 계급의 격차없는 일반 공공 교육이 실시되었다. 또한 쯔빙글리의 의견에 동조했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사살을 다른 스위스 자치주에까지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존재했던 스위스 연맹(Swiss Condederation)은 현대적 개념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률과 정부를 가지고 있던 여러 자치국가들의 모자이크적 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몇 가지 공동 목표들, 특히 독일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모였다. 이러한 모자이크적 연합 아래 일부 자치주들은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으며, 나머지들은 모두 계속 로마교회에 복종하였다. 이미 존재하였던 각종 갈들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차이점으로 인하여 내란이 불가피하게 보였다. 가톨릭 자치주들은 찰스 5세와 동맹을 맺을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쯔빙글리는 시기를 놓치기 전에 프로테스탄트 자치주들이 먼저 군사적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지역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먼저 무력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았다. 마침내 취리히가 전쟁을 시작할 시기가 되었다고 결정하였을 때에 다른 프로테스탄트 자치주들이 이에 반대하였다. 그후에는 쯔빙글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자치주들이 자기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합스부르그(Hapsburg)가 출신 찰스 5세와 협력하였으므로 반역행위를 저지른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1531년 10월 5개 가톨릭 자치주들이 취리히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곳의 수호자들은 적진의 깃발을 볼 때까지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쯔빙글리는 도시가 본격적으로 방어선을 마련하기까지 지연 작전을 펼 선발군에 합세하여 진군하였다. 카펠(Kappel)에서 가톨릭 자치주들은 취리히군을 격파하였는데, 쯔빙글리도 이때 전사하였다. 이로서 한달도 안되어 카펠 화의(The Peace of Kappel)가 조인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은 당시 전쟁에 소요된 경비들을 보상해 주기로 하고, 그 대신 각 자치주들은 독자적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게되었다. 그때부터 프로테스탄트주의는 몇몇 스위스 자치주들 속에서 확고한 자리들 잡게 되었다. 또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 한주에서 다른 주로 인구가 자유로이 이동함에 따라 각 자치주들이 가지는 종교적 색채는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9/2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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