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향 이명희 (캘거리)
7박 8일 간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배 안에 육지의 편의 시설을 고루 갖춰놓았다 하니 호기심에 기분이 설레었다. 서구 노인들은 크루즈 여행을 선호한다는데 배 안에서 다양한 음식으로 세끼를 해결하고 오락과 극장의 쇼, 온천, 수영, 카지노 등을 이용할 수 있어서란다. 행동반경이 좁으니, 다리가 아픈 사람들에게 장점이란다. 유람선에서 알게 된 일행은 해방둥이 세 명과 베이비 부머 세 명이었다. 해방둥이들이 서울서 학교에 다녔으면 포실하게 살았을 법한데 이민의 나이테가 많아서인지 강한 성격이 드러났다. 수령 탓인지, 성격 탓인지 미국서 온 언니가 여행 내내 친구와 삐거덕거렸는데 할머니들의 티격태격이 재밌고 귀여웠다.
캐나다 언니는 처녀 때부터 꿈꿨던 아메리칸드림을 52세가 되어 이뤘다는데 불나방 같았던 나의 사십 대보다 용감한 것 같다. 빵이 싫어 버틸 대로 버티다가 가족 때문에 이민을 왔다는 미국 언니가 식사할 때마다 빵과 샐러드를 먹는 모습은 코미디 같다.
세계적인 인플레와 코비드의 여파로 실물경제가 나빠진 게 확실하다. 미국 언니는 크루즈 여행이 네 번짼데 이번 음식이 별로고, 친구도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지 않는다며 불만이 많다. 캐나다 언니는 사고 위험으로 자식들이 운전 금지령을 내려 어쩔 수 없었다며 “내년에는 꼭 로키를 투어 하자”며 친구를 달랬다. 미국 언니가 “이번이 마지막이야. 늙었는데 어떻게 또 오냐!”며 토라져 대꾸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연령대라 두 분의 상한 마음을 풀어 드린다고“내년에 친구를 만나러 오시면 함께 구경해요”라고 오지랖을 떨었다. 나이 들면 몸이 약해져 마음도 흔들리는가 보다.
우리가 탄 유람선에는 70% 이상이 노인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효도 관광으로 휠체어를 타고 왔다. 여행은 건강이 허락할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체력도 문제지만 총기와 감흥이 떨어져 만족한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여행의 한계는 칠십 중반인 것 같다. 포교를 열심히 하는 언니와 부정적인 언니의 에고가 리듬을 탔는데 그럼에도 배 안의 시설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유람선 여행은 선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레스토랑에 앉아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노인이 되어도 유교적 사고로 공경 받기만 원하면 안 된다는 것과 대화를 나눌 때도 당신의 과거사, 현대사를 일방적으로 말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며 젊은 사람과 어울리려면 옛날 뒷마당 우물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유대인 속담이 떠오른다. 나도 노인의 초입에 들어서니 젊은 사람들과 교제할 때면 신경이 쓰인다. 그들도 나를 구식이라 생각할까 봐서다. 다행인 것이 캐나다 언니가 긍정적이고 마음이 열려 소통이 잘 됐다.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의 자서전[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껏 살면서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너무 닦달하며 인생을 숙제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늘 의무와 책임감에 치여 어떻게든 그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들을 놓쳐 버렸다.’ 이는 저자가 22년간 파킨슨병을 앓는 중에 쓴 회고록이다.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말이다.
노인들의 여행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천금같은 여행이다. 산 날보다 살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행의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여행 상품을 잘 고르고, 누구랑 동행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어려운 도전이니만큼 후회하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야 한다.
여행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노인들은 저가 상품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살아온 습관이 있어 젊은 세대들처럼 선뜻 돈을 쓰지 못한다. 방을 선택할 때도 젊은이들은 비용을 주고라도 뷰가 있는 방을 선택하는데 노인들은 창문이 없어도 저렴한 방을 선택한다, 여건을 갖추었어도 하루아침에 소비 성향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모양새 있게 살지 못한다.
거대한 유람선이 바다를 유유히 누빈다. 멋진 빙하를 바라보는 황혼기의 사람들. 노인들의 새가슴이 조각배처럼 흔들려 혼마저 표류하고 있다. 만감이 교차하여 고난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텐데, 이제는 행복한 노후를 위하여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건강을 챙기며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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