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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가나안 _ CN드림 창간 3주년 기념 이민수기 공모전 최우수작
CN드림 창간 3주년을 기념해 실시한 제 1회 이민수기 공모전의 수상자 명단을 발표합니다.

최우수작 : 약속의 땅 가나안 (양재설, 캘거리 근교 Morrin 거주)

우수작 : 지성이면 감천 (Grane L. Kim, 에드몬톤 교민)

우수작 : 이민 간다고? 가서 뭘 할건데? (이경찬, 캘거리 교민)

이번 이민수기 공모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아 주셨으나 글을 준비하는 기간이 짧았고 기존 문인들이나 글을 발표하신 분들보다는 신인 발굴차원에서 시도하다 보니까 지원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번 제2회 부터는 글을 쓰실 수 있는 준비기간도 늘리고 상금도 더 높여 더 많은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으며 이번에 응모해 주신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심사위원은 편집부및 외부 인사로 하려고 했으나 응모자가 많지 않아 편집부 내에서 평가를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안내문에서도 밝힌바 있듯이 작품은 총80점 만점으로 평가되었으며 과거 교민 신문에 한번도 글을 발표하지 않았던 양재설님과 이경찬님은 가산점 20점을, Grace Kim님은 과거 1회 교민신문에 글을 발표한 바 있어 10점을 추가로 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수상자들에게는 수상내용을 개별통보 할 예정이며 이번호부터 최우수작인 양재설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3주에 걸쳐 연재예정이며 우수작2편도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양재설님 당선 소감

이력
1937년 1월 9일 서울 출생
1968년 4월 캘거리로 이민
1969년 캘거리 제2대 한인회장 역임
Mannix Co.에서 엔지니어로 근무
현재 Morrin(캘거리에서 한시간 거리 소도시)에서 자영업 운영
슬하에 두 아들(양형석, 양홍석) 모두 결혼해서 현재 캘거리에서 살고 있음.


이번에 이민수기를 쓰게 된 동기는?
그동안 저의 이민생활을 글로 남기고 싶어서 전부터 조금씩 써왔는데, 이번에 CN드림에서 이민수기공모전을 보고 한 달 동안 글을 모두 마무리하고 다듬어 응모를 하게 된 것입니다.

최우수상으로 당선되신 소감은?
그동안 글을 써본 적도 많지 않고, 한번도 발표하지 않은 사람의 글을 뽑아주시어 감사할 뿐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더 글을 쓰실 계획이 있으신지?
그동안 글을 쓰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많이 쓰기는 그렇지만,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다른 분들에게 공감이 되는 그런 이민생활의 글을 몇편 더 써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캘거리 이민초기 역사에 대해 많이 개입을 하였고 지금도 많은 것들이 머리속에 있는데 이런 것들을 이민 역사를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기회가 닿으면 정리를 하려고도 구상중 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_ 1
2001년 6월 1일에 노인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통지서를 캐나다 정부로 부터 우편으로 받았다. 내가 캐나다에 온해는 1968년 4월 5일 이니까 33년 2개월 만인 셈이다. 캐나다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된 인연은 아주 오래된 셈이다.
8.15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문교부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과서용으로 발간한 세계 지리 부도책이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고 5학년이었는데 내 나이 또래인 사촌 형제들과 이책을 가지고 나라 이름과 그 나라의 수도 이름을 찾는 놀이를 했었다.
우리들은 처음 보는 나라 이름과 수도의 이름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었다. 한글로 표시된 발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가나다’란 이름이였다. (지리 부도책에Canada를 ‘가나다’로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무슨 나라이름이 ‘가나다라마바사’냐고 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이 있었다.
나를 웃기던 나라 ‘캐나다’에 와서 산지 3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고 65세가 되어 노인 연금까지 받게 된 것이다. 1966년 캐나다 정부는 문호개방정책을 세워 유색 인종에 대해서도 이민을 허락해 왔다. 이 사실이 파주에서 조용히 직장 생활을 하던 나에게도 알려 졌다. 캐나다라고 하면 한번 가서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왜 캐나다라고 하면이란 표현을 했나하면 3,4년전 그러니까 5.16 직후에 내가 특수 설계연구소에서 철도 교량 설계팀에 관여하고 있을때 였다. 나와 같은 기술자들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월남 또는 보르네오, 사라와크 등으로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같이 신청하자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위장병으로 몸도 약해져 있었는 데다가 월남은 전쟁하는 곳이고 보르네오와 사라와크는 열대성 기후때문에 몸이 약한 내가 잘 적응할것 같지 않아서 거절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나다는 달랐다.
그때 들은 소문으로는 캐나다는 미국과 인접해 있어서 미국의 영향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나라이고 실업자 보험, 의료 보험 등 각종 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실직을 해도 생활비가 보험회사로 부터 나오고 만일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해도 입원비 전액을 보험 회사에서 부담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실행되고 있지 않은 좋은 조건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보장제도는 당시 한국의 사정에 비교해 볼 때 말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 였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에 갈 것을 결정하고 홍콩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 한문과 영문으로 작성한 이민 신청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그런데 3-4개월이 지나도록 캐나다 영사관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마도 캐나다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받지 않는가 생각 하고 캐나다 이민에 관해서 거의 잊고 있을때 이번에는 일본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을 이러했다.
그 동안 홍콩에 있던 캐나다 영사관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영사 업무를 그곳에서 취급한다는 것과 종로 2가에 있는YWCA 2층에서 면접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를 면접한 사람은 이름, 나이, 학력, 경력, 가족 관계를 다시 확인한 다음 캐나다 어느 도시로 가기를 원하는가를 물었다.
나는 캐나다 이민을 허락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도 캐나다 영사관에서는 약 6개월동안 나에 관해서 다 조사를 하고 면접을 통해서 특별히 부 적합한 이유가 없는 한 이민을 허락하기로 결정하고 면접을 했던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준비된 Graph를 내놓았다. Graph 하단 가로에는 캐나다 주요 도시 이름이 적혀있었고 세로에는 Civil Engineer 가 필요한 숫자와 현재 있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Graph를 보면 어느 도시에 Civil Engineer가 필요한 수보다 현재 있는 수가 많고 적은지를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현재 필요한 수 보다 더 많이 있는 것으로 표시 되어 있는데 Calgary는 필요한 수보다 Civil Engineer가 상당히 모자라게 표시 되어 있었다. 나를 인터뷰한 사람은 Graph를 보여주면서 Calgary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Calgary는 유전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도시이니 나같은 Civil Engineer가 정착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캐나다 Calgary로 가기를 결정하고 이민준비를 하면서 영등포에 계시는 부모님께 제일 먼저 이 사실을 말씀 드렸다. 나는 당연히 찬성하실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깐 생각을 하시는 듯 하시더니 나의 캐나다 이민을 반대 하신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아들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것이고, 둘째 캐나다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라고 하는데 그런 나라에 가면 바닥에서 고생하며 살것이 뻔한데 그렇게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살면 당신이 일구어논 경제적 기반도 있고 나는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도 있으니 적어도 중류급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 그리고 집사람의 임신 때문에 부풀어 있던 나의 이민 계획은 당분간 보류상태에 있게 되었다.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면 늦어도 1967년 말 안에 캐나다로 떠날려고 했었다.
집사람이 아들을 순산했고 1967년도가 지나고 1968년 새해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1968년 1월에 소위 김신조 사건이 타졌던 것이다. 김신조 사건이란 이북에서 특수 훈련을 받은 일개여 소대 병력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월남을 해서 고 박정희 대통령 목을 벨 목적으로 거의 청와대 앞까지 쳐들어 왔던 사건이다.
이때 한국의 분위기는 곧 6.25와 같은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위압감이 돌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셨다. 미리 피난가는 셈치고 갈려면 가라고 허락하셨다. 이때부터 우리는 캐나다 이민수속에 박차를 가해 필요한 수속 절차를 밟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는 한국 남자가 꼭 해야하는 서류중에 하나가 군 복무확인 증명서였다.
이 서류는 병사구 사령부에서 발급해 주는데 나는 군복무와 재훈련까지 다 마친 사람으로써 신청만 하면 확인 증명서를 해줄 것으로 믿고 파주에서 새벽5시 첫 버스를 타고 서울 병사구 사령부에 도착하니 근무시간 40분전이었다.
문열기를 기다렸다가 첫번째로 서류를 창구에 접수시켰다. 그랬더니 담당직원은 서류를 읽어 보지도 않고 책상 한켠으로 던지듯이 밀어 놓으면서 “다음 주에 와 보슈.”하는 것이다.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까지 와서 필요한 서류를 못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허탈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사정을 했다. “여보세요, 나는 지금 서울에 살지도 않고 파주에서 하루 일도 다 빠지고 새벽 첫차로 여기 까지 왔는데 무조건 다음주에 와 보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늦게라도 좋으니 오늘중으로 안되겠습니까?”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를 신경질 적으로 탁탁치면서 “여기 쌓여있는 접수된 서류들을 보시요. 순서대로 해야 할거 아닙니까?” 하면서 다른사람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그 동안 몇사람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자리를 옆으로 비켜서서 재확인을 하기 위해 다음 주에 오면 틀림 없이 해줄것이냐고 다짐을 하니까 다음 주에도 그때 가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파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되어 기회를 봐서 다시 사정을 할려고 서성거리면서 ‘주님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는데 옆에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상사인듯 한사람이 나오더니 “어이 양재만 (梁 在 萬) 이꺼 어디 있어?” 하면서 책상 가까이 오더니 방금 직원이 밀어 놓은 내 서류를 집어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0월 14일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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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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