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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과기대에서 돌아온 문영환 교수 _ 만나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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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드림에서는 최근 연변 과학기술대학교에서 10년반 동안의 교수생활을 마치고 캘거리로 돌아온 문영환 교수를 지난 10/21일 만나보았다.
문영환 교수는 한국 통일의 선구자적인 역활을 하였던 고 문익환 목사의 막내동생이며 또한 캘거리 초대 한인교회인 [한인장로교회]를 세우는데 초석을 마련했던 문재린 목사의 3남중 막내 아들이다.
본지에서는 문영환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재직당시의 그곳 이야기들과 수차례 방문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느낀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어보았다
질문) 연변에 가시게된 동기는?
답변) 형님이신 문익환목사께서 북한을 방문하셨을때 촬영한 비디오를 보고 많은것들을 느껴 북한에 가서 봉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형님께서는 북한에 가는건 아직 시기적으로 이르다며 우선 연변이라도 가면 할일이 많을 거라고 해서 그쪽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질문) 연변과학기술대학교에서는 주로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답변) 제 전공이 영어영문학이므로 우선 영어를 가르쳤으며 교양과목으로 영화, 음악,스포츠등을 지도하였습니다.
질문 ) 최근 북한 동포들이 겪는 고통들이 각종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한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실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각종 매스컴을 통해 보는 그런 보도가 다 맞는건가요?
답변 ) 북한은 정말 가난합니다. 두만강변에 근무하는 북한군인들이 밤이면 쌀을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너오곤 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변의 주민들과 북한 군인들간에 사고가 발생하여 최근 경비가 강화되었죠. 북한에 가족이 있어 쌀을 가지고 국경을 방문하면 경비를 서는 군인들이 짐을 검사하면서 쌀을 한바가지씩 퍼가는건 이제 관례가 되어버렸습니다 . 북한에 모든 아이들과 성인들 모두 너무 삐적 말라 보기에 딱할 뿐입니다.
그외 북한은 아직도 유리를 가공하지 못해서 안경을 구하기가 매우 힘든데 돋보기조차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습니다 . 북한에서 만들어진 공책을 보니까 남한에서 해방직후 볼수 있었던 그런 허름한 공책을 지금도 쓰고 있더군요.
전국적으로 전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남한에 전기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실제 북한내 전기 라인이 모두 낙후되어 있어 실제 전기를 보내준다 해도 북한은 받을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철도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예요. 일제시대때 설치된 선로는 이미 낡을대로 낡아 기차가 지나가면 철로에 막은 큰 못들이 들썩들썩 합니다. 그래서 기차들도 속도를 낼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더 딱한건 북한에 있는 의사들중 혈압계나 청진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 그래서 환자가 오면 진맥이나 하고 눈으로 관찰하여 치료해 주고 약을 처방해 주는데 그 약도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어 못 구할 경우에 대비해 서너가지 대체약을 써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질문 ) 이렇게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답변 ) 지난 90~91년경 북한에 쌀보내기 운동이 한창 열리던 때였습니다. 당시 본인은 토론토에 있었는데 일부에서는 북한에 쌀을 보내면 군량미로 쓰이니까 보내면 안된다고 하였는데 내 생각을 달랐었요. 일단 군인들은 배가 고프면 안되요. 그들이 배고프면 총을 서울로 혹은 평양으로 겨눌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사태가 겉잡을수 없게 되죠. 그래서 군량미가 어느정도 북한에서 군량미로 쓰인다고 해서 우리가 보낸 쌀의 의미가 없는것은 아니예요 . 그리고 북한의 젊은이들(군인)도 결국은 우리의 동포가 아닌가요. 어느 나라고 사회고간에 굶주린 곳에 쌀을 보내면 군인들이 먼저 먹는건 일반적인 상식일 뿐입니다 .
질문 ) 연변대학에서 오랜세월 몸을 담고 계셨으니까 연변의 조선족들과 북한의 젊은이들의 성향에 대해 한 말씀?
답변 ) 최근 중국이 큰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도 모르고 게다가 자유주의는 더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찌보면 연변의 젊음이들은 중국의 단점과 남한의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 그리고 책임이 불분명하다는 사회주의 특성상 요즘 젊은이들은 거짓말도 잘하고 잘못해도 죄책감 같은건 없어요 . 대학에서도 시험중에 커닝을 하다 들켜 내가 시험지를 보는 앞에서 찢어 버려도 태연하에 강의실을 걸어나갑니다 . 이런 상황을 잘 모르고 연변에 간 교직원들이나 목회자들이 이들의 거짓와 위선으로 마음아파 하는 경우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최근 연변 조선족들은 중국 본토방송을 아예 없애도 위성방송을 달아 모두 남한방송만을 보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남한사회의 문제점들을 직접적으로 접하는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TV방송을 통해 언어와 문화를 익혀 서로간의 문화차이가 좁혀지고 있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질문 ) 이렇게 고통받고 어려움이 처해있는 북한동포들에게 선교활동을 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변 ) 선교도 좋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북한동포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 이전에 너무 굶주려들 있습니다. 선교 방법론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기네 교회에서 혹은 자기네 선교사들이 직접 나가 선교활동을 해주기를 원하지만 실제 그 효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북한동포들은 오랫동안 폐쇄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 남한이나 서방세계에 대해 신뢰감도 없고 불신감이 많아요 . 그대신 그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족들과 더 가깝고 친근하며 신뢰를 하죠. 그래서 북한에 선교를 위해서는 우선 연변의 조선족들을 잘 훈련시켜 그들이 북한선교를 위해 최전방에서 뛰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실제로 연변에 그동안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인들도 많이 늘었지만 그 교회의 젊은이들 대부분 성실하고 정직한 모습은 적고 교회를 다니는 이유도 신앙심보다는 다른것에 더 관심이 많아 (주로 남한에 들어가는 계획때문) 오랜세월 교회를 다녀도 세속인들과 구분이 안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질문 ) 핵을 포함한 북한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한말씀?
답변 ) 제 견해로볼때 현재북한에는 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만들만큼의 기술이나 자금이 너무 약합니다. 또 진짜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국제무대에서 강대국들(미국,중국,일본등)이 이러한 미지근한 자세를 보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현 북한의 군사력은 형편이 없습니다.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무기나 기름(석유)를 외상으로 사오다가 하도 빛이 많으니까 이제는 현찰없이는 물건을 주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어 물자부족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언젠가 소련과 중국에서 하도 물자를 대주지 않으니까 한번은 북한이 미국달러를 현찰로 모두 준비해서 물건을 구입하러 갔는데 돈을 다 받고는 외상장부를보며 그동안 밀린대금을 일부 지우고는 그대로 가버리더랍니다. 현재 북한에는 비행기든 탱크를 굴릴 휘발유가 없습니다. 비행기 조정사들도 휘발유가 없어 비행연습도 못하고 그외 탱크나 장갑차등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어요. 무기들도 대부분 60년대 들여온 것들로 거의 쓸모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난번 이라크전에서 알수 있듯이 전쟁전에는 큰소리를 쳤고 저항이 강할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밀고 들어가니까 제대로된 저항 한번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것 보셨죠 ? 북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쳐들어 가면 쉽게 무너질것이라고 믿습니다. 단지 북한의 무력함을 알면서도 그들을 치지 못하는건 아직 남한이 북한을 수용할만큼의 경제력 뒷받침이 안되어 있다는데 어려움이 있는것이죠 . 독일이 통일당시 서독의 경제가 한국의 열배이상의 튼튼한 경제구조였지만 통일 후 경제적으로 크게 고생을 하고 있는것을 보고있지 않습니까?
질문 ) 북한의 문화사정에 대하여
답변 ) 평양에 백화점이 있는데 정부관자들이 보여주지 않아요. 배급된 물건들 뿐이니 보나마나 뻔다하는게 이유였죠. 평양시내에 제법 크다는 호텔내 2층에 서점이 하나있어 들어보았는데 일반 구멍가계정도의 비좁은 공간에 책이라고는 고작 팔만대장경 번역본과 김일성 어록집 그리고 기초피아노 교본등이 다였고 그외는 비디오와 테입등이 전부였습니다. 김일성 대학내 도서관에도 가보았는데 그 많은 책들이 다 30~40년은 되어보였고 글씨도 읽기가 힘들정도였습니다. 최신 도서는 거의 볼수가 없었죠. 게다가 조명은 왜 그리도 어두운지...
질문 ) 끝으로 문교수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한말씀?
답변 ) 연변의 과학기술대학 김진경총장은 현재 평양에 과학대학을 짓기위해 준비중에 있으며 그분이 나를 보고 같이 가서 일을 해보자고 권유중으로 고민중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 문영환교수는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다가 다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연출과 촬영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스포츠로는 배구가 주특기로 대한체육회 산하 배구협회 회장도 역임하였으며 토론토에서 열린 많은 한인대회에서 심판을 본적이 있으며 연변에서도 배구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문교수는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재직당시 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합창곡집을 5권이나 직접 편곡,작사,번역등을 하여 발행한바 있다. 그외에 서방세계를 알리는 교양, 일반 상식등과 관련된 서적도 열권이상 손수 만들어 연변대학에 기증하고 왔다.
현재 문교수는 캘거리에 거주하고 있다.
본 글은 CN드림 제31호(2003년 10월 31일자)에 실렸던 글이며 본 글에 대한 저작권은 CN드림에 있습니다. Copyright 2000-20003 CNDream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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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3-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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