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앗시리아 제국의 유물
마라, 프랑스 혁명의 주역중 한명
이번에 10박11일 파리 여행을 했다. 네번째 파리 여행인데 이번으로 파리여행은 졸업이다. 파리에 대한 이미지가 각자 다르지만 필자에게 있어 파리는 ‘혁명의 도시’다. 루블 박물관은 전에도 가본 적이 있어 갈까 말까 망설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따라 나섰는데 가기를 잘했다. 루블 박물관은 여전히 관람객들로 붐볐고 한국인들이 많아 박물관이고 미술관이고 사방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문화를 사랑하기는 프랑스 사람 뺨치는 민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루블 박물관에서 ‘마라의 죽음’과 길가메시를 볼 수 있었다. 루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마라의 죽음’은 복사본으로 원본은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있다. 필자 같은 그림의 문외한에게는 원본 그림을 보나 복사본 그림을 보나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혁명의 도시에서 혁명 주역의 죽음을 그린 그림을 봤다는데 의의가 있다. 마침 그 그림 앞에는 관람객들이 없어 그림을 바라보며 비운의 혁명가 생각을 해보았다.
마라는 누구인가?
마라(Jean Paul Marat)는 프랑스 혁명의 주역 중 한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3번에 걸쳐 일어난 사건인데(1789년 혁명,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보통 1789년 일어난 첫번째 혁명을 말하고 첫번째 혁명을 특히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성난 군중들이 앵발라드로 몰려가 무기를 탈취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다. 앵발리드는 루이14때(1671년) 상이군인들과 퇴역군인들 재활 병원으로 세워졌다. 지금은 군사박물관이 되었으나 건물의 일부가 아직도 군인들 재활에 쓰이고 있다. 전제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날, 폭도들은 성스러운 애국자가 되었다. 7월14일을 프랑스에서는 혁명 기념일로 기린다. 가두폭력에 의한 정권 탈취는 그후 전통으로 내려와 프랑스에서는 3명만 모이면 혁명을 일으킨다는 말이 생겼으나 1871년 파리 코뮌으로 폭력에 의한 정권탈취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고 그중 에는 어설픈 평화주의자들이 혁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폭력성만을 부각한 책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은 귀족 성직자의 특권계급이 타파되고 평민의 세상이 도래함을 알렸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실현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마라는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좌파인 자코뱅 산악파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의사이자 과학자이기도 한 마라는 혁명이 나자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발행해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의 이익을 대변해 지지를 얻었다. 급진적이고 과격파인 마라는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공포정치를 이끌며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가 중심이 된 반 혁명세력을 단두대로 보냈다. 피부병을 앓고 있던 마라는 한동안 집에서 요양하며 목욕으로 피부병을 치료했는데 지롱드 당(자코뱅에 대척점에 있는 보수파) 샤로트 코르데가 방문해 목욕 중인 마라를 암살했다. 그날이 1793년 7월13일로 마라를 암살한 코르데는 혁명재판에 회부해 4일 후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 마라는 국가 유공자 묘소인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나 나중에 재평가되어 퇴출되었다. 혁명이 나고 성당으로 쓰이던 건물이 국가 유공자 묘소가 된 팡테옹에 1호로 안장되는 영광은 미라보 백작에게 돌아갔다. 미라보는 귀족이었으나 혁명이 나자 평민들의 편에 서서 혁명을 주도한 공로로 팡테옹에 1호로 묻히는 영광을 누렸으나 그 후 루이 16세와 정치적 거래를 한 것이 발견되어 퇴출되었다. 팡테옹이 국가 유공자 안식처가 된 지 200년이 넘었으나 묻힌 사람은 78명에 불과하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묻혔더라도 재평가 이뤄져서 마라나 미라보처럼 퇴출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 국립묘지도 재심사해서 친일 반역자들, 독재 부역자들은 퇴출시키는 날이 올까? 마라가 죽고 친구이자 혁명 동지인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림으로 그렸다. 다비드의 그림에서 마라는 혁명가 다운 풍모는 없고 숭고한 순교자로 그려졌다. 혁명의 순교자. 다비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로베스피에르와 궤를 같이 하는 자코뱅 산악파로 루이16세 사형을 찬성한 시해파 의원 중 한명이다. 마라의 죽음 후 혁명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 반혁명을 되풀이하며 공화정, 복고왕정, 통령 정부, 제국, 자유주의 왕정, 공화정을 되풀이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 역시 평가를 달리해 원본 그림도 이리저리 망명 중에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귀속되었다.
아! 길가메시
근동 아시아 전시관에 들어가니 거대한 석조물들이 보였다. 아시리아 제국의 유물들이다. 이 유물들은 니느웨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로 구약의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를 강도의 도시, 약탈의 도시라고 불렀다. 성경에서는 아시리아, 바벨론을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핍박한 악의 세력으로 묘사한다. 솔로몬 이후 북부 이스라엘, 남부 유대로 갈라졌는데 북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했고 남부 유대는 바벨론에 멸망당했다. 근동 아시아 전시관에 길가메시가 있다. 4,500년 전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제국을 건설하고 서사시를 쓰며 인간의 삶과 죽음을 논했는데 그때 유럽인들은 소와 소고기도 구분 못하는 야만인들로 수렵으로 근근이 먹고 살았으니 “나중 난 뿔이 우뚝 하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인다. 길가메시는 반인 반수의 왕으로 알려졌다. 그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영생불사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는 노아의 새카만 선배인 우트라피시팀이라는 노인을 만나는데 이 노인은 영생과는 무관한 홍수 이야기를 들려줘 길가메시를 실망시킨다.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는 구약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와 아주 비슷해 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설화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벤치마킹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들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들이 말썽만 부리자 “이놈들을 물로 멸망시키자.”고 합의를 했다. 그런데 여신 에아가 우트라피시팀에게 신들의 계획을 누설하며 피할 방법도 알려준다. 노아의 선배인 우트라피시팀은 여신 에아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방주를 만들어 가족들과 온갖 가축을 실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노아 홍수 설화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해서 홍수를 피해 살아남은 우트라피시팀은 신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신들은 그에게 영생의 특별한 은총을 선사했다. 그러나 영생은 신이 내리는 특별한 은총일 뿐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트라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인간에게 잠이 필요하듯 죽음도 필요하다.’ 면서 “그러니 젊은이, 영생이니 뭐니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시게.” 그래도 길가메시가 영생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우트라피시팀의 부인이 “그 젊은이 꽤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데 불로초나 한 뿌리 줘서 돌려보냅시다.” 그래서 길가메시는 불로초 한 뿌리를 얻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이거라도 가져가자.” 노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길가메시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길가메시는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을 발견하자 목욕이나 하겠다고 옷을 벗고 그 곁에 불로초를 놔두고 개울물로 들어갔다. 그때 뱀이란 놈이 나타나 불로초를 홀랑 먹어버렸다. 구약에서도 뱀이란 놈이 나타나 여자를 유혹해 죄를 짓게 해 남편과 함께 낙원에서 쫓겨나는 원인을 제공하는데 근동에서는 뱀을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재수 없고 불길한 짐승’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허무하게 뱀에게 불로초를 빼앗기자 그제서야 영생의 헛꿈에서 깨어난 길가메시는 현명한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자리잡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창시한 수메르인들, 문명의 주인공들이 바뀌면서 역사도 달라졌다. 구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 여정이 나와있다.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갈대아 우르가 메소포타미아의 일부 지역임을. 그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공통 조상이 되었으나 이 세상 모든 갈등의 대부분이 3대 종교에서 비롯되었으니 하늘에서 아브라함이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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