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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운명의10월26일
운명의 시각은 어김없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10월25일 저녁, 안중근은 할빈의 조림공원 경내 송화강변을 거닐며 산만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결의를 다졌다. 그는 채가구에 동지 우덕순과 조도선을 남겨두고 혼자 할빈으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이 갖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신문기사였다. 이등박문이 특별열차 편으로 10월25일 11시 장춘을 떠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후초프가 기다리는 할빈에 온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불안했다. 과연 신문기사가 정확한 것인지 확신 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춘을 떠난 이등박문이 혹시 할빈에서 내리지 않고 채가구에서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라 우덕순과 조도선을 그곳 일을 맡기고 돌아온 것이다. 안중근이 송화강변을 거닐고 있던 그 시간, 채가구 기차역 구내 식당 주인 세미노코프는 역무원의 호출을 받았다.

“당신 식당에 조선인 3명이 머물고 있다면서?”
“한 명은 아까 오후에 할빈으로 돌아가고 두 명만 남았는데.”
“수상한 자들 아닌가?”
“불쌍한 사람들이야, 돈 가진 것도 없고. 도와줘야지.”
“여긴 왜 온 거야?”
“친척이 장춘에서 온다는데 여비가 없어 장춘까지 못 가고 여기서 기다라는거야.”
“오늘 밤에도 재워줄 건가?”
“이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내몰면 얼어 죽으라고?”
“그런데 내일 일본 고관이 이 역을 통과하거든. 그때까지 그 사람들 문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줘. 밖에 나가면 경비병들에게 꼭 연락 하라구.”

이등박문을 태운 특별열차는 채가구에서 10분간 정차했다 출발했다. 그 때까지 러시아 경비병들은 식당 입구를 봉쇄해 우덕순과 조도선이 용변보러 밖에 나가는 것도 막았다. 우덕순은 하늘에 대고 빌었다. 우리는 실패 했으나 안 동지는 꼭 성공하라고.

이등박문, 우리 입장에서는 나라를 빼앗아간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총리대신을 4번 지낸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일본을 탄탄한 제국주의 반석에 올려놓은 은인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하급무사 시절 열혈 과격파로 테러와 암살에 앞장 선 인물이었으나 지방 토호들의 신임을 얻어 영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초대 조선 통감 시절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 퇴임을 밀어붙여 순종에게 양위를 하게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으로 최고의 작위인 공작이 되었다. 조선 통감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추밀원장이 되었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은 생애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갈대가 바람을 피해 갈 수 없듯 산전 수전 다 겪은 68세의 노회한 정치인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꿈에도 생각치 못하는 이등박문은 10월16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하는 상선을 타고 이틀 후 18일 중국 대련에 도착했다.

10월25일 밤 11시. 이등박문을 태운 특별열차는 목적지인 할빈을 향해 늦가을 만주벌판을 달렸다. 러시아 최신형 기관차가 끄는 특별열차 귀빈실은 응접차와 연결되어 있었다. 저승사자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이등박문은 열차 귀빈실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10월26일 아침. 평소처럼 일찍 일어난 안중근은 평상복에 모자를 쓰고 김성백의 집을 나섰다. 할빈역에 도착하니 7시였다. 그는 대합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긴장을 풀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열차가 도착한 모양이다. 일본인들이 플레트 홈으로 달려나간다. 안중근도 일본인 거류민단 틈에 끼어 플레트 홈으로 나섰다. 9시 정각, 기차가 가을 하늘에 흰 증기를 내뿜으며 플레트 홈을 향해 들어온다. 안중근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열차가 정지함과 동시에 도열한 러시아 군악대가 주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열차는 예정시간 보다 빠르게 할빈역에 진입하고 있었다. 기관사는 시간에 맞추려고 속도를 늦췄다. 8시에 일어난 이등박문은 세수를 하고 정장을 입고 플록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섰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할빈역 구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군악대의 연주가 할빈역 플레트 홈에 울려 퍼지며 이등박문과 코코후쵸프는 맨 앞에 서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역 구내 시계는 9시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등박문은 일본 거류민단 환영단 앞을 지나 군악대쪽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침착했다.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성공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가슴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앞으로 튀어 나오며 방아쇠를 당겼다. 북국의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총알은 이등박문의 가슴에 박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열 발자국 정도였다.

세발의 총알로 이등박문의 숨통을 끊은 안중근은 아주 짧은 시간에 “저 자가 만약 이등박문이 아니라면?’ 이라는 의구심이 번개처럼 들었다. 그는 나머지 세발의 총탄을 이등박문을 뒤따르던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 수행 비서 모리, 만철 이사 다나까 에게 한 발씩 선사했다.

안중근은 총기사용이 익숙했고 사격술이 뛰어났다. 상황이 끝난 것을 감지한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불렀다. 러시아 기병장교 노그라조프, 니키포로프가 달려들었다. 안중근은 권총을 거꾸로 잡아 그들에게 넘겨주고 순순히 포박되었다.

이등박문은 곧 열차 안으로 옮겨져 수행의사의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절망적이었다. 피격 당한지 30분 뒤에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시신을 담을 관이 도착했다. 이등박문은 살아서 장춘에서 타고 온 기차에 시신이 되어 실려갔다.

10월26일 아침 채가구역. 우덕순은 안중근의 성공을 빌며 아침식사도 거른 채 조도선과 역 구내를 어슬렁거렸다. 오후 기차로 할빈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식당 주인 세미노코프는 이들 조선인들이 불쌍해 보여 아침식사를 줬다. 막 식사를 시작하는데 러시아 경비병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체포했다.

경비초소로 연행된 우덕순은 거기서 안중근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체포된 것 보다 안중근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그는 뛸 듯 기뻤다. 이등박문의 시신을 실은 기차가 채가구역에 도착할 무렵 우덕순과 조도선은 포승줄에 묶여 할빈행 열차에 오르고 있었다.

-안중근의 이야기-
그날 밤,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을 모조리 벗고 수수한 양복 한 벌을 갈아입은 뒤에 권총을 지니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거기(하얼빈 역)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 장관과 군인들이 많이 와서 이등박문을 영접할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차 파는 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이등박문이 탄 특별기차가 와서 닿았다. 그때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 그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언제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하며 십분 생각하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이윽고 이등박문이 차에서 내려오자 도열해 있는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북받쳐 일어나고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이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이 일이 이같이 공평치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사람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하고는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 군대가 도열해 있는 뒤에까지 이르러 보니, 러시아 측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맨 앞 가운데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낱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여 오고 있었다.

"저 놈이 필시 노적(老賊) 이등박문일 것이다."

곧 권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 쪽을 향해 4발(실제는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등박문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일행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쏘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러시아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양력(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붙잡혀 갔다.


기사 등록일: 201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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