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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첩) 독도, 일본의 억지 주장의 허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일본은 때만 되면 “독도는 우리 땅”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지진과 원전사고라는 돌발변수에도 올해도 여전히 ‘독도는 우리땅’을 외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검정이 4년 주기로 실시되니 지진과 원전사고는 사실 돌발변수가 될 수 없고 독도문제는 예정된 수순에 불과한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고 낙수물이 바위를 뚫듯 끊임없이 주장하다보면 나중에는 정말 ‘우리 땅’이 될 것으로 간주하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 교과서를 통해 “독도는 우리 땅” 임을 주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일본사람들이 담백하고 ‘앗쌀이’ 할뿐만 아니라 의외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기질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 문제가 나오면 일본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독도가 내것’임을 주장하는데 한국사람들은 언성이 높아지며 주먹부터 올라온다고 한다. 거기에는 ‘욱 하는’ 한국사람들 기질도 있지만 조상 대대로, 신라 때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 정벌할 때(지증왕 13년 서기 512년) 독도도 팩키지로 정벌해 1,500년 이상을 내 땅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느닷없이 이웃집에서 “네 땅이 아니라 내 땅”이라고 우기니 주먹부터 올라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76년 일본 내무성은 전국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 전국의 지적조사를 각 현에 지시했다. 이때 시네마현은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던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 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내무성에 문의했고 내무성은 10월16일 태령관(내각)에 자문을 구했다.

이에 태령관은 자체 조사에 나서 5개월간에 걸쳐17세기 이후의 조선-일본간의 문건을 조사한 결과 울릉도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1877년 3월 29일 내무성에 “다케시마 외일도는 1699년에 조선과 구 일본정부(에도막부)간에 왕래가 끝나 본방(일본)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의 지령문을 내려 보낸다.

즉, 1877년 일본 내각은 에도막부 시대에 이미 일본은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인정했음을 내무성에 지시한 것이다.

1885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에서 발간한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제5편 조선동안(朝鮮東岸) 부분에는 독도를 ‘리앙쿠르암’으로 표기하고, 울릉도와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두 섬 모두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의 사실로 볼 때 일본이 독도에 흑심을 품고 ‘우리 땅’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국력이 신장해 서구열강과 함께 제국주의 야욕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이다. 1905년 시네마현은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1905년 2월22일 시네마현의 고시 40호는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9분30초 동경 131도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다께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

일본은 시네마현 고시가 국제법상 무주지선점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다. 신라, 고려시대는 너무 먼 옛날이라 그만 두더라도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우산과 무릉 두 섬이울진현 정동에 속해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보인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또한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의거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할 때 독도도 그 관할구역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무주지선점을 하려면 주변국가에 알려야 하는데 독도 편입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1년도 넘어 1906년 3월5일 대한제국에 알려왔다. 그러나 그 때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보호국으로 전락해 시네마현의 독도 편입에 대해 항의 조차 할 수도 없었다.

일본은 도서를 자국 영토로 편입할 때 각의(국무회의)를 거쳐 관보와 신문에 고시하는데 독도를 편입하면서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관보는커녕 일간신문 어디에도 독도 편입을 고시하지 않았다. 영토 취득 같은 중대한 문제를 국가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일개 현에서 고시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러일전쟁 당시 일본 군부가 독도를 일본에 편입시키려 공작을 꾸미자 내무성에서 “조선 조정의 저항으로 일이 쉽지 않을 것”이며 “서구 열강들이 일본이 조선을 병탄 할 것이라고 의심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독도 편입을 반대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일본이 누구보다도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무주지 선점’ 운운이 모순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독도가 당연히 우리 땅으로 알고 있지만 국제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예를 든다면 독도 문제에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 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패전국 일본의 주권회복과 2차대전 종식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4일부터 9월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는데 주요의제는 2차대전 때 일본이 빼앗은 영토는 원주인에게 다시 돌려주고 일본의 영토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일본 군사력 범위, 침략 당한 나라에 대한 배상이었다.

1947년 3월 작성된 강화조약 초안 1장4조에는 “일본은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s)와 권원(titles)을 포기하고 울릉도 독도 거문도를 포함한 모든 한국 해안 섬들을 포기한다”고 되어 있다.
여러 번 첨삭을 거듭한 초안은 49년 10월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49년 12월15일 초안에서 졸지에 독도가 일본영토로 둔갑하였다. 초안 2장 제3조엔 “일본 영토는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 주요 섬에 쓰시마, 다케시마(리앙쿠르 록-독도를 뜻함), 오키리토, 사도 등을 포괄해 이뤄진다”고 적혀 있다.

그러다 최종문안에는 독도가 아예 빠져 일본령도 아니고 한국령도 아닌 것으로 되었다. 2장 a항에 “Quelpart(제주도) Port Hamilton(거문도) Dagelet(울릉도)를 포함한”으로 나온다. 이것은 영토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취급해 나중에 영토분쟁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일본측의 정치적 술수가 관철된 것으로 독도뿐 아니라 러시아와 북방섬 4개 문제로 중국과는 조어도 문제로 영유권 분쟁이 생겼다.

49년 12월15일 초안에 독도가 일본령으로 둔갑하고 나중에 반발을 예상해 일본령도 한국령도 아닌 것으로 빼버려 독도문제를 애매모호하게 한 것은 국무부 주일정치고문 윌리엄 시볼트의 로비가 주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시볼트는 미 국무부의 친일인사로 부인이 일본인이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 어린아이들이 동네에서 정감록의 예언구절 같은 것을 뜻도 모르고 외우고 다녔는데 “소련에 속지말고 미국 믿지 말자 일본 일어선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독도문제와 관련해 볼 때 미국은 정말 믿지 못할 나라이고 일본은 패전국 멍에를 썼지만 다시 일어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엉터리 참언(讖言)이지만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독도문제와 관련해 미국을 믿지 못할 것은 1954년 벤 플리트 보고서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미8군 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벤 플리트는 1954년 4월26일-8월7일까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 대만, 일본, 필리핀을 돌아보며 “1954년 극동지역 군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수행한 벤플리트 미션에 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다.

벤플리트 보고서의 독도관련 내용은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문안을 작성할 때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독도가 일본 주권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해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한국에 은밀히 통보하였다. 미국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지만 그들의 영토분쟁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들의 영토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제소에 관한 미국의 제안도 한국에 비공식으로 전달한 바 있다.”

독도를 실효지배 하는 한 ‘조용한 외교’를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 된다고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독도문제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역사왜곡에 앞장서는 일본 국수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교과서 회사가 지유샤(自由社) 후소샤(扶桑社)인데 두 회사의 역사교과서 점유율이 해마다 증가해 2001년 0.039%에서 2005년 0.4%, 2009년 1.7%로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 올해 목표는 10%라고 한다. 자라나는 일본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독도는 우리 땅인데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고 배우는 것이다.

독도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머리 질끈 동여매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규탄대회 해서 독도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것은 전혀 없다. 해마다 일본대사 불러 엄중항의 하는 것도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이제는 우리도 독도문제에 대해 생각을 바꾸고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대통령이 ‘촐랑거리며’ 일본대사관 찾아갈게 아니라 러시아 대통령처럼 독도 방문 하는 것, 이왕이면 장관들 대동하고 독도 방문 하는 게 국격 높이는 것 이란 걸 잘 알텐데.


기사 등록일: 201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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