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을 훔쳐보는 붉은 렌즈… 뚫려버린 국가 안보망
연방정부 철거 지시 16개월 경과 · 핵심 기관 이행 거부 및 은폐 · 사후 감시 시스템 부재 논란
사진출처: 기자가 묘사하고 AI가 그림
(이은정 칼럼) 평범한 거리를 걷고 민원을 위해 관공서를 방문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의 감시망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국가 안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 훨씬 더 차갑게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다.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무거운 경고와 함께 중국산 감시 장비에 대한 전격적인 퇴출 명령이 내려진 지 어느덧 1년 4개월이 흘렀다. 하지만 정부의 방패는 생각보다 헐거웠다.
당시 캐나다 연방정부는 중국계 감시 장비 업체 하이크비전(Hikvision)의 카메라가 대규모 감시와 간첩 활동에 악용될 수 있다며 단호한 영업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매서웠던 정부의 호통이 무색하게도 국립연구위원회(NRC)와 윈저-디트로이트 교량관리청(WDBA) 등 일부 핵심 기관에서는 여전히 문제의 렌즈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다. 심지어 우주국을 포함한 5개 연방 기관은 제조사의 소송을 핑계로 철거 여부조차 함구하며 장막 뒤로 숨어버렸다.
감시 카메라가 단순한 촬영 장비를 넘어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침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뼈아픈 경고 속에서, 겉도는 안보 정책의 민낯과 길을 잃은 사후 통제력의 실태를 짚어본다.
허울뿐인 안보 심사, 요지부동인 현장
캐나다 연방정부는 2025년 6월 27일, 투자캐나다법(Investment Canada Act)에 따른 국가 안보 심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이크비전 캐나다(Hikvision Canada Inc.)의 사업 청산과 모든 영업 활동 중단을 전격 명령했다. 중국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이 세계적인 감시 장비 제조사의 캐나다 내 사업 활동이, 간첩 행위나 대규모 정보 수집에 악용될 수 있다는 중대한 위험성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당시 멜라니 졸리(Mélanie Joly) 산업부 장관의 발표는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됐다. 물론 이 명령이 캐나다의 일반 가정이나 민간 사업자가 기존에 구매한 제품의 사용까지 전면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 기밀과 공공 데이터를 다루는 연방 부처 및 산하 기관 내에서는 발 빠른 장비 철거와 보안 점검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년 4개월이 흐른 지금, 요란했던 제재 발표와 현장의 실제 이행 사이에는 좁히기 힘든 거대한 괴리가 드러나고 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기관들, 깊어지는 불신
명령을 내린 주체는 정부지만, 정작 이를 이행해야 할 내부 기관들의 행보는 엇박자를 내고 있다. 법무부나 보훈부 등 일부 부처는 즉각 관련 장비를 철거했다고 밝혔으나, 캐나다 우주국, 환경기후변화부, 캐나다 공원청 등 5개 핵심 연방 기관은 철거 여부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이크비전 측이 정부 결정에 반발해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침묵의 이유다.
이들 기관이 실제로 장비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조치의 이행 여부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는 태도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다. 민감한 정보와 연구 자료를 취급하는 국가 기관이라면, 구체적인 보안 세부 사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의 이행 현황과 향후 교체 일정은 명확히 설명해야 마땅하다.
기밀 아니면 안전하다? 안일한 인식의 위험성
더욱 충격적인 대목은 일부 기관이 하이크비전 카메라를 당당히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연구위원회(NRC)는 주요 보안 시스템에서는 장비를 철거했지만, 이른바 '민감하지 않은' 구역에서는 여전히 해당 카메라를 가동 중이다. 윈저-디트로이트 교량관리청(WDBA) 역시 일반 지역 사무실에서 장비를 사용 중이며, 2026년 말에나 가동을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해당 카메라가 외부 인터넷망이나 내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아 안전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보안 전문가들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전직 연방 국가안보 분석가 데니스 몰리나로(Dennis Molinaro)와 캐나다 보안정보국(CSIS) 출신 앤드루 커시(Andrew Kirsch)는 감시 카메라가 단순한 렌즈가 아님을 분명히 경고한다.
장비 내부에 탑재된 소프트웨어와 통신 기능은 언제든 해킹의 통로로 돌변할 수 있다. 나아가 기밀 구역이 아니더라도 기관 직원들의 동선과 일상적 대화 내용 자체가 외부 세력에게는 훌륭한 정보 수집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언을 넘어선 책임감 있는 사후 관리 절실
결국 이번 사안은 국가 안보가 단호한 '발표'와 '선언'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차가운 교훈을 남긴다. 특정 기업에 사업 청산을 명령했다면, 그 지시가 최일선 현장에서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 끝까지 추적하고 통제하는 사후 관리 시스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최근 졸리 장관은 연방 기관들의 지속적인 금지 장비 사용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unacceptable)"며 뒤늦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산하 기관에 호통을 치기 전에, 연방정부가 스스로 내린 명령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정보 누수를 막기 위해, 정부는 지금이라도 남은 장비들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고 신속한 대체 인프라 구축에 나서야 할 때다.
[자료 출처]
• 캐나다 혁신과학경제개발부(ISED), National security decisions
• 캐나다 혁신과학경제개발부(ISED), 공공안전·국가안보 상임위원회 제출 자료
• National Post, Christopher Nardi, Chinese surveillance cameras are still around, despite ban in government buildings (2026년 10월 8일)
• National Post, Christopher Nardi, Joly says it's 'unacceptable' that government offices continue to use banned Chinese cameras (2026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