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수도원 중심의 교회 개혁_간략한 기독교 역사 21
카롤링 왕조의 몰락과 함께 발생한 폭력과 부패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경건한 신앙인들은 무자비한 정적들이 교황의 자리를 두고 유혈극을 만들고, 성직을 사고 팔 뿐만 아니라 유력한 자들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 슬픔과 분노를 금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두 곳으로부터 나타났다. 하나는 수도원이고 다른 교황이 주도하는 개혁이다. 이번 시간에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 개혁을 알아 보자.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에 개혁을 갈망하였던 인물들은 교황의 조직 아래에 있기 보다는 대부분 수도원을 택하였다. 따라서 결국 교황청을 압도하고 유력한 자들과 대결하며 멀리 성지 이스라엘의 해안에까지 미쳤던 개혁의 물결은 수도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수도원 자체도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수많은 수도원들이 스칸디나비아인과 헝가리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이러한 침략의 불길을 피한 수도원들은 탐욕에 찬 수도원장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제물이 되어갔다. 수도원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맡았던 귀족들과 감독들은 오히려 수도원들을 사유 재산화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거나 혹은 전임자를 살해하고서 수도원장직을 차지하였으며 그후에는 수도원의 수입을 사유화했다. 베네딕트의 '규율'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였으며, 진정 수도생활을 마음 속으로부터 추구하였던 사람들은 무언가 급격한 변화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애퀴테인의 공작 윌리엄 3세가 자신의 사냥터 부지 위에 소규모의 수도원을 만들었다. 당시에 귀족들이 수도원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가지 현명한 결정들과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이 조그마한 수도원을 거대한 개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윌리엄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Berno)를 초빙하였다. 베르노는 이미 수도원 개혁을 위한 열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베르노 이후에 6명의 유능한 수도원 원장들이 약 200년에 걸쳐서 수도원을 이끌었다. 이들의 지도 아래 수도원 개혁의 물결이 널리 퍼져갔다. 처음에 이곳의 수도사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단순히 베네딕트의 '규율'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곧 다른 수도원들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개혁의 내용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주된 작업이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 성무일과, 즉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전체교회의 개혁을 향하였다. 이 당시야말로 교황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라 할 수 있었다. 교황들은 타의에 의해 단기간 내에 교체되었으며, 교황들과 감독들은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음모와 권력 투쟁에 연관되어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윌리엄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해 연합하였다. 교회 개혁의 이상을 가슴에품고 노울의 브루노는 그의 동료들, 즉 힐데브란트와 훔베르트를 동반하고 로마를 향해 갔으며, 이곳에서 브루노는 레오 9세의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하였다. 교회 개혁가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국왕들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일체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성직 매매야말로 당장 제거해야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개혁의 또 다른 큰 적수는 성직자들의 결혼이었다. 수세기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독신을 지켰으며 이를 적극 권장하는 움직임도 여러 번 있었으나 독신 제도가 하나의 규범으로 강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특히 수도원의 모범에 힘입어 이 개혁가들은 성직자들의 독신 제도를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제도의 하나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제까지는 수도사와 수녀들에게만 요구되었던 이 제도가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요구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개혁 운동은 가난(淸貧)의 문제에서부터 서서히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른 수도원 개혁 운동이 재산에 관련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물론 모범적인 수도사는 아무런 재산을 지니지 않은 채 단순한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그러나 반면에 수도원은 재산 및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생활을 동경하였거나 혹은 장래 영혼의 구원을 보장받고자 하였던 신자들이 막대한 선물과 유산을 계속 제공함으로써 수도원의 재산은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때문에 수도사들은 베네딕트의 '규율'이 요구하였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개혁자들은 수많은 감독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였으나 동시에 수세기를 두고 축적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교회의 권리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였다. 결국 축적된 거대한 재산으로 말미암아 수도원 개혁 운동이 실패하게 되었다. 교회의 재산 때문에 교회는 유력한 자들의 음모에 대적하여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들의 편에 설 수 없었다.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6/3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6-26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연방치과보험 드디어 5월 1일 ..
  캐나다 금리 인하 임박…연말 4..
  캘거리 부동산 시장, 2024년..
  “범죄 집단에 비자 내주는 캐나.. +1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캘거리 4월 주택 매매량 올라 ..
  자영이민 신청 접수 전면 중단 ..
  캘거리 22세 남성, 아내 살해..
  주정부, 캘거리-에드먼튼 철도 ..
  해외 거주 캐나다인 약 400만..
댓글 달린 뉴스
  요즘은 이심(E-Sim)이 대세... +1
  에드먼튼 대 밴쿠버, 플레이오프.. +1
  캘거리 시의회, “학교 앞 과속.. +1
  “범죄 집단에 비자 내주는 캐나.. +1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