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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몰락의 시작_기독교 역사 24
13세기는 중세 문명과 서방 기독교의 전성기였다. 이노센트 3세 때에 교황의 권력은 최정상에 다다랐다. 동시에 탁발(托鉢)수도회(mendicants)들은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귀속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학교에서는 뛰어난 신학 체계가 발전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유럽은 최고의 영적 권위를 갖는 교황과 세속적 권력을 보유한 황제 아래 연합되어 있었다. 또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으므로, 동?서방 교회들 사이의 분열도 치유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통일의 구조 속에서도 중세 기독교의 몰락을 재촉하는 약점들이 있었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국가주의(Nationalism), 전염병,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침략 등이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열어갔다. 1.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 확장과 왕권의 강화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Bourgeoisie, 도시에 사는 사람들)"는 봉건 영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귀족들 간의 전쟁,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한 세금들, 그리고 자급자족을 추구하였던 대영주들의 욕망 등은 모두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의 교역을 저해하고 그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왕권을 통해 물건의 교역이 보호받고, 산적들을 퇴치하며, 화폐 제도를 통솔하고 사소한 전쟁들을 종식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대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을 지원하였다. 국왕 역시 이러한 부르주아들과의 동맹을 통하여 이익을 얻었다. 국왕들이 대군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자금이 없을 때는 강력한 봉건 귀족들이 국왕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국왕은 강력한 봉건 귀족의 세력을 누를 수 있는 군대의 운영자금을 부르주아들로부터 얻었다. 그리하여 중세에 있어서 중앙 집권 군주제의 성숙은 은행가들 및 상인들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병행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몇몇 근대 국가들이 발전하였다. 프랑스, 잉글랜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이 상당히 강력한 군주들 아래 통일되었던 최초의 국가들이다. 2. 국가주의(Nationalism) 국가주의(Nationalism)는 이 시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원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어느 도시, 혹은 어느 지방 출신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주민들은 자신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항한 공동 연대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군주에 의해 통일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주의는 우주 전체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교화의 주장을 잠식하였다. 만약 교황이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지면 영국인들은 이에 불복하고 노골적인 저항까지 표시하였다. 반면 교황이 프랑스인들의 영향권을 벗어나고자 하면,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그의 라이벌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어느 교황을 좇을까에 관한 문제로 전체 유럽이 양분되었다. 그 결과 교황청은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막대한 권위와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은 교황청 외의 다른 곳으로부터 시작될 교회의 개혁을 기다리게 되었다. 14-15세기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사건은 잔다르크가 등장하는 "백년 전쟁"(1337-1475)이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었지만 유럽 전체가 이에 개입하게 되었다. 오랜 전쟁은 교회 생활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 기간 중 한동안 교황들은 프랑스의 보호 아래 아비뇽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인들은 교황을 자기들의 대적으로 보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백년 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동맹 및 적대 관계에 따라 교황들을 선택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당시의 국제 관계로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으므로, 우주적 권위를 주장하는 교황청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3. 흑사병 후기 중세 시대 교회 생활의 중요한 배경을 연출하였던 또 하나의 사건은 1437년의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었다. 북해 연안에서 발발한 흑사병이 이탈리아로 옮겨간 후에는 3년 만에 유럽 전체에 퍼지게 되었으며 인구의 격감을 가져왔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이 전염병, 혹은 이에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흑사병은 그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적으로 유럽 전체가 여향을 받았다. 우선 공산품의 소비 장소인 시장이 자취를 감추었다. 사망률이 높지 않은 지역에서는 실업율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의 사망은 중요한 종교적 결과를 불러왔다. 아직 면역성을 갖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희생자가 되었으므로, 마치 죽음의 신은 젊은이들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건강했던 자들을 무차별 공격하였던 전염병의 성질 자체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선조들이 믿었던바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식인들은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반 평민들은 미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공포가 천지에 만연하였다. 전염병의 공포, 지옥의 공포,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곧 직면해야 할 심판의 공포 등으로 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런 전염병으로 일어난 일에 대하여 기독교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이슬람의 포위 때문에 서방 교회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1443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의 총대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제를 끊었다. 1453년 4월 7일에 모하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결국 5월 29일에 도시가 함락되었고 술탄이 병사들에게 이미 약속했던 대로 사흘 밤낮 동안의 무제한 약탈이 허락되었다. 그 후 모하메드 2세가 입성함으로써 동방의 가장 장엄한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선지자 모하메드의 이름이 울려 퍼지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7/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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