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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 길 -밴프로 가는 길 _ 김주안(캐나다 여류문협)
 
이튿날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보았던 높은 산봉우리들은 구름 에 가리고 사방은 온통 습습하다. 이곳 크로싱(Crossing)은 서스캐치원 빙하에서 시작된 노스 서스캐치원 강이 흐르는 곳으로 남으로 레이크 루이스 가는 길과 동으로 11번 고속도로의 분깃점이다.
수천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이 강기슭에서 사냥을 하고 야영을 하며 살아왔고 19세기에는 모피 무역의 중요한 루트였다. 모피상 데이비드 톰슨의 활약상이 이곳에서 꽤 유명하다.
상록수 숲을 지나면 강기슭에 크로싱의 역사와 지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에니스, 아르벨, 이사도르, 파울 데이비드 같은 원주민 추장들의 사진이 전설처럼 걸려 있다.
이곳은 크로싱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길과 길도 만나고 사람과 사람사이도 소통되는 여러 길이 열려 있다. 과거로 가는 길도 있고 동으로 가는 길도 보이고 남으로 북으로 오르고 내리는 길도 이곳 길 위에 있다.
내게도 한때 이 많은 길 위에서 대책없이 서성인 적이 있었다. 목표물도 정하지 못한 채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 넉넉했던 시간을 그냥 흘렸다. 이십대를 목마르게 건너가고 있는 딸아이가 바로 내 모습이다. 그 딸아이가 밴프에 있다. 우리는 밴프로 가는 중이다
보우 서밑(Bow Summit)을 가까이 다가서자 비는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다. 온 세상이 하얀 설국이다. 이 전망대는 무려 해발2067m라고 하니 백두산이나 한라산 보다 높다. 일찍이 9월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눈은 이듬해 4월까지 계속 된다고 한다. 그런데5월에도 내리다니 기이하다. 하긴 예전에도 6월 하순경이었는데 눈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보우 서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페이토 호수가 있다. 1900년대 초, 캐나디안 로키 지역 가이드로 활약했던 페이토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호수다. 앞선 몇몇 여행객들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섰다. 내리는 눈은 이 세상의 모든 길들의 경계를 지워버린 듯하다. 페이토 호수라는 목적지를 정했건만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지독한 눈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더 이상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여행객들이 순전히 눈 때문에 허둥대며 되돌아나왔다.
페이토 호수 가는 길이 막혔다.

다음날 딸아이가 속해 있는 그룹들과 다시 이 보우 서밑을 찾았을 때는 어느새 두툼한 눈길이 나 있었다. 어제의 무채색 표정과는 달리 뽀얀 눈 위로 내리는 햇살에 숲은 반짝거렸다. 천진하게 쏟아지는 아이들의 웃음도 그렇게 반짝거렸다. 칼든산과 패터슨 산 사이에 평화롭게 내려앉은 페이토 호수. 토사와 빙하가 계절과 섞이면서 천상의 물색을 만들어 낸다는 페이토. 봄부터 가을까지는 에메랄드빛, 겨울이 오면 비치색으로 조화를 부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천연의 물색. 오늘은 무심하게도 그 물색을 깊은 얼음 밑으로 숨긴 채 무덤덤하다.
5월 말경에 눈이 온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짧은 치마를 입고 눈밭을 겅중겅중한 걸음으로 앞서는 딸아이를 뒤따르며 생각해 낸 것이 5월에도 눈이 온다는 사실이다. 마치 막힌 길이라도 만난 듯 허둥대던 딸아이를 내가 미처 몰랐던 5월에 오는 눈 때문이라고 마음의 가닥을 잡는다. 눈을 들어 멀리 로키의 설산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시큰거린다.
보우 서밑을 내려오니 보우강 가에 있던 붉은 색 지붕을 인 라지가 기억을 일깨운다. 1920년대, 캐나다 로키의 가이드로 활약한 지미 톰슨(Jimmy Thomson)이 지은 넘티야 로지(Num-Ti-Jah Lodge)다. 보우강은 재스퍼에서 밴프까지 93번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구불대며 오랫동안 따라온다. 보우는 원주민 언어로 ‘활’이란 뜻이다. 마릴리 몬로가 주연했던 영화<돌아오지 않는 강>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깊고 어두운 날씨 탓인지 시간은 흐르는 것도 잊은 채 한눈을 팔고 있는 것 같다. 구름안개는 산 아래까지 허리를 펴고 강을 덮고 있는 거대한 얼음 위로는 적막만이 두텁다. 빨간 점퍼를 입고 붉은색 지붕을 인 라지를 배경으로 느릿느릿 기념 사진을 찍었다.

레이크 루이스는 11년 전 노란 민들레 밭의 기억을 합친다면 네 번을 만났다. 그때 빨간색 점퍼를 샀던 샘슨 몰에 들려 오늘은 커피를 하기로 했다. 한적하다고 기억되던 샘슨 몰은 이층으로 증축되어 여행객들로 붐빈다. 여행을 하는 내내 그러했듯이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 늦은 점심을 했다.
잔뜩 흐린 하늘을 이고 있는 레이크 루이스는 곳곳에 쌓인 눈더미와 호수를 뒤덮은 얼음과 소매 끝을 파고드는 찬바람 일색이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10대 절경 중 하나라고 하지만 예전에 상큼하고 깨끗한 절경은 왠지 흐려 보인다. 호수는 반쯤 얼어붙어 침묵하고 있고 둘러쳐진 빅토리아 산은 엄숙하다.
다음날 딸아이 그룹들과 다시 찾았을 때도 매서운 바람 때문에 모자끈을 단단히 매야 했다. 찬바람을 피해 호텔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에 들어섰다. 커피 라운지의 타원형 창은 레이크 루이스를 따뜻하게 내다보고 있다. 실내는 세계적인 명성을 만나러 온 여행객들로 들썩인다.
요호국립공원으로 넘어가던 날, 네 번째 만남을 가진 날은 햇살이 화창했다. 그러나 바람은 잦아들 줄 모르고 여전히 맵다. 호숫가를 거니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냉엄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우리는 차곡차곡 환상을 쌓아놓은 밴프로 가는 길이다. 밴프에는 서걱이는 그리움이 있을 것이고 빛나는 풍광이 반길 것이다. 막힌 듯 보여 허둥대던 길은 어느새 열려있었고 무덤덤한 목표물을 만나고 되돌아 나오기도 하면서 길은 그렇게 이어졌다.
5월에도 눈은 내리고 시간도 때로는 한눈을 파는 것을,
대책없이 여러 길을 서성일지라도 결국 한 길로 내몰리게 되는 것을,
그것이 인생의 길인 것을.

기사 등록일: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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