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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 박사와 캘거리 한인회 (약속의 땅 가나안4)
지난 8월초에 열린 한인의 날 행사에 참석한 김창영 박사 모습, 김 박사는 최초 캘거리 한인으로서 초창기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글 : 양재설 (캘거리 교민, 캘거리 한인회 2대회장 역임)

1968년 4월 5일 식목일날 우리가족은 캘거리에 왔다. 나무를 심으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족을 이 땅에 심어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4월 답지 않게 눈보라가 휘날리며 매서운 찬바람이 우리가족을 맞아 주었다. 나의 이민 시작은 이렇게 캘거리 기후만큼이나 차갑게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SW에 위치한 맥도널드 성씨를 가진 사람의 집 2층에 싸구려 셋방을 정하고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직 직업도 못 구하고 차도 없고 돈도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하루하루 걱정하며 살고 있을 때였다. 김창영 박사 사모님으로 부 터 전화가 왔다. 우리가족이 캘거리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한국사람 입맛에 맞는 쌀과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주말에 들리겠다고 하셨다.
전화 받은 주 금요일 저녁때라고 생각 된다. 김 박사와 부인께서 우리가족을 방문 해 주셨다. 김 박사는 대학 교수라는데 잠바 차림에 쌀자루를 어깨에 매고 우리가족이 사는 허름한 2층 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고맙고 황송할 데가 없었다.
김박사님 내외분의 방문은 우리가족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 주었다. 나는 이때의 고마움을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잊지 못한다. 그 동안 우리는 주인집이 장보러 갈 때 따라가서 Safeway를 다녀왔고 양념 등 소소한 것이 필요할 때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사다가 해결하고 있었다.
김박사 가족을 알게 되면서부터 우리가 좋아하는 쌀은 일본 할머니가 운영하는 구멍가게에서 살수 있고 반찬거리는 차이나 타운에 가서 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캘거리에 이민 오는 사람들은 김박사로 부 터 정착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말이 되면 김박사 댁에 몰려가서 한국말로 떠들어 가면서 그 동안 이민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이렇게 김박사 댁은 한인 교포들의 중심이 되었고 모든 새로운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 지금은 딴 세상 사람이 된 이석원, 윤영주씨 같은 분들은 가족을 한국에 놔두고 혼자서 온 분들인데 이 분들이 가족을 초청해서 올 때도 김박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캘거리 사는 모든 한인 교포들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오는데 비행장에 마중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김박사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김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셨고 같은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하다가 1957년에 워싱턴대학에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첫 번째로 부임한 곳은 알래스카 앵커래지 대학이었고 1965년에 캘거리 대학에 물리학 교수로 부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캘거리에 거주하시게 된 분이시다.
미국 생활과 캐나다 생활에 경험이 많은 김박사님과 같은 분이 캘거리에 다른 어떤 한국사람보다 먼저 정착하신 것은 후에 오는 사람들의 이민 생활의 길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에 합당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김박사를 한인 교민에게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요한과 같은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한도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이 하실 일을 쉽게 사역할 수 있도록 그 길을 평탄 게 했다고 요 3:3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첩경을 예비하라 그의 길을 평탄케 하라 하셨느니라”.
캘거리에 한국 사람이 이민 오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다. 그리고 한인회가 발족한 것은 1968년 8월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한인회 같은 조직의 필요성들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당시 백선엽대사가 영사 한 분과 같이 캘거리를 방문 하였는데 백 대사의 권유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투표하고 말고도 없이 김박사를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부회장에는 최병기씨(한인라이온즈 초대 회장역임)가 선출되었다.
이러한 모임을 가질 때도 김박사 집을 이용했다. 다음날 백대사와 영사를 모시고 전 교민이 밴프에 있는 미네완카 호숫가로 가서 바비큐를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때는 또 김박사 댁에서 모여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가까이서 백대사와 하루를 같이 지내면서 받은 인상은 과거에 4성 장군으로 전 한국군을 호령하시던 위엄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 인자한 전형적인 한국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지 안병준(토론토로 이주했고 지금은 작고한 분이다.) 씨가 묻기를 동생 되시는 백인엽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형님(백선엽)만 빼놓으면 무서운 사람이 없다고 했다는데 동생 되는 분에게 무섭게 대하셨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글쎄 나는 처음 듣는 말인데 만일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것일 거라 하셨다. 이런 모든 일들이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이 느껴지는데 4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간 일이라니 믿기가 어렵다.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70대를 훌쩍 넘겼고 40대 초반이었던 김박사는 80을 훨씬 넘은 노인이 되었다. 평생을 대학에서 가르치시다 은퇴하신 지도 20여년이 흘렀다. 김박사님의 환갑잔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김박사를 위한 어떤 잔치에서 고 함석보 집사님의 축사 말씀 중 일부가 생각나서 적어보겠다.
“김박사님은 발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발이 되어 주셨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입이 되어 주셨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어주셨다”.
4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캘거리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지금은 만 여명에 달하고 그 인원수에 걸맛게 한인회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렇게 발전한 데에는 역대 한인회장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임원들 그리고 모든 한인들이 다같이 힘을 모은 데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인회를 이만큼 발전시킨 경험이 있다.
이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한인회가 한인들만을 위한 한인회가 되지 말고 캐나다 주류사회에 까지도 영향을 주는 한인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는 캐나다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한인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 아울러 김박사께서 한인회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아놓으신 한인회의 원조이므로 그분의 노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도해 본다. 참고로 백선엽 대사는 초대 캐나다 대사님이었다.

기사 등록일: 200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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