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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첩) 삼일절 이 섭섭한 사람들 / 3월에 생각나는 군인
-삼일절 이 섭섭한 사람들-

삼일절, 기미 독립 선언을 맞는다. 삼일절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볼세비키 10월혁명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의 애국심이 폭발해 일제의 조국 강제점령에 대항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강대국간에 힘의 논리로 빚어진 식민지쟁탈전의 부산물이다. 제국주의의 힘의 팽창으로 약소국을 점령하여 식민지 지배를 하는 것이 일반화 된 광풍(狂風)의 시대에는 강대국들 사이에 식민지 점령을 묵인해 주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점령을 묵인해주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묵인해준 가쓰라-테프트 조약이 그런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국가들끼리 동맹을 맺던가 타협해 상대 세력을 위협, 견제했는데 이런 동맹국 집단끼리 식민지쟁탈전을 벌인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1차대전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고 전승국들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했는데 전승국 대표들이 파리평화회의에서 합의한 것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정리한 것이 민족자결주의로서 각 민족은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 없이 민족 스스로 정치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 집단적 권리를 말한다.
타민족의 간섭이나 지배 없이 내 민족문제는 내가 결정한다는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는 한민족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볼세비키 10월 혁명도 큰 희망이 되었다. 민중의 힘으로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무혈혁명으로 전제군주를 타도했다는 소식은 우리 한민족에게도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염원과는 달리 독립과 자주는 무산되었으나 기미 독립 선언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이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의 꿈을 실현시켜 나갔다.
올해는 92번 째 맞는 삼일절이다. 고국에서는 삼일절을 맞아 여러가지 행사가 있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그 지역의 한인회관이나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기념식을 갖고 애국선열들의 행적을 기린다.

그러나 삼일절에 잊혀진 사람들, 삼일절이 섭섭한 사람들이 있다. 나눔의 집에 살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토론토에서도 알파(ALPHA)주관으로 위안부들 문제를 다룬 영화 ‘끝나지 않은 전쟁’ 상영 및 각종 토론으로 국제사회가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정부로 부터 공식적 사과및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로서는 삼일절이 섭섭한 날이다.
위안부 할머니들 가운데 올해 다섯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정신과 육신이 찢겨진 채 평생을 살다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 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고 삼일절이 섭섭한 날이 아닌 기쁜 날이 되는 것은 언제일지.


-3월에 생각나는 군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1927-1989.3.4)

영원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1927년-1989년3월4일)은 전두환 일당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던 12월12일 저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헌병감 김진기 준장과 함께 전두환의 사주를 받은 허화평에게 속아 연희동 요정에 갔다 정승화 총장 연행 소식을 듣고 부대를 장악하려고 사령부로 귀대했다.
장태완 소장이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전화한 내용에 따르면 정병주 사령관에게 전화해 “아까 우리가 같이 갔는데, 이놈들이 장난하는 건데, 거기 우리가 빠진 것 같은데”라고 하자 정병주 사령관은 “장태완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놈의 새끼들 다 죽어야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부하들에게 배신 당하고 체포되는 비참한 일을 당한 것은 정병주 사령관과 장태완 사령관인데 장태완 사령관은 부임 2달만에 생긴 일이니 부대장악이 덜되었고 내 사람이 없어 그랬다 해도, 물론 명령체제가 엄정한 군에서 부임한지 하루가 되었던 두 달이 되었던 사령관의 정당한 명령에 불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자식처럼 키운 부하들에게 배신 당했으니 그 심적 고통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을 것이다.
12월 13일 새벽 1시30분 9공수여단에 출동명령을 내린 정병주 사령관은 약 30분 후 3공수 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보낸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에게 총격을 당한 후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다. 이날 하극상으로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전사했다.
6사단 참모장으로 있다 67년 공수단장으로 임명된 정병주 준장은 74년까지 공수단장을 지내며 오늘날 특전사령부 기틀을 닦은 특전사 대부로 1공수 여단장 박희도 준장, 3공수 여단장 최세창 준장, 5공수 여단장 장기오 준장 등 모두 정병주 사령관이 아끼던 부하들이었다.
1971년 위수령 때 공수단장 정병주 준장은 서강대학교에 진주하였는데 총장이나 학장 면담 시에는 반드시 권총을 교무처에 맡기고 들어가 학교 관계자들이 예의 바른 지휘관이라고 했다.
반면 고려대학교에 진주한 위수군은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으로 지성한 대령이 지휘관이었는데 지성한 대령은 교수들 군기 잡는다고 팬티바람에 집합시키는 둥 원성을 들어 정병주 장군과 비교가 되었다. 지성한 대령은 현재 한성실업 회장으로 유명 연예인의 시아버지다.
80년 1월20일 강제 예편 당한 정병주 장군은 “군인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면서 예비역 장성을 위해 정부에서 마련해 주는 국영기업, 공기업의 고위직을 고사하고 청렴하게 살았다.
강제예편 후 그는 회한의 세월을 보냈다. 최정예부대 사령관으로 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 믿었던 심복부하들에게 당한 배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장군의 푸념(87년)-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 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
회한의 세월을 보내던 정병주 장군은 88년 10월16일 성당에 다녀온 후 오후 8시경 집을 나가 소식이 없다 89년 3월4일 송추유원지 근처 야산에서 목 멘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신 근처에는 소주병 3개와 빈 종이컵이 발견되었다. 반 자동 시계는 19일 11시45분에서 멈춰있어 시신이 발견되기 4개월 반 전인 88년 10월19일쯤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국은 정병주 장군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했으나 유족 등 일부에서는 타살 가능성을 제기해 논란을 제기했다. 동작동 국립묘지 제1 장군묘역 168호에 묻혀있다.


-박흥주 대령 육사 18기(1939년12월15일-1980년3월6일)-

인간은 태어나 많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으며 산다. 만남의 인연이 숙명적으로 되기도 하는데 김재규-박흥주의 만남도 숙명적 만남이다.
평안북도가 원적지인 박흥주 대령은 서울고등학교(10회)를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 소위 임관 후 군인의 길을 걸은 전형적 군인으로 중위 시절 6관구 사령관 김재규의 전속부관을 하면서 김재규와 인연을 맺어 대령 진급 직후 78년 4월부터 정보부장 수행비서를 지내며 유신시대를 끝내는 현대사의 격동기에 정보부장의 명령을 수행하다 국사범(역적)으로 몰려 총살당한 군인이다.
박흥주 대령은 육사18기로 동기생들 중 진급이 빨라 62년 소위 임관 후 16년인 7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주변에서는 박흥주 대령을 깨끗한 사람, 겸손하고 괜찮은 사람, 지금이라도 육군총장 할 수 있는 사람, 등 평이 좋은 군인이다.
그가 박정희 살해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수사관들이 집을 찾아 가는데 행당동 산꼭대기 달동네 반지하에서 전세를 사는 그의 집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는 일화가 있다. 육군대령이자 정보부장 수행비서가 그런 곳에서 살 줄을 몰랐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밤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 후 김재규를 수행해 같이 극방부에 간 박흥주 대령은 27일 0시40분 김재규가 체포된 직후 무장해제 당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부장 차를 타고 국방부를 빠져 나와 새벽에 중앙정보부 남산분청으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육본으로 들어오라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메시지였다. 그는 육군본부로 가는 대신 새벽 4시, 행당동 달동네에 있는 집을 찾아 부인을 만났다. 그러나 부인의 얼굴만 보고 이문동 중정 본청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중정 1차장실에서 차를 마시다 보안사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현역군인신분인 박흥주 대령은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1908년 3월6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지 서울고등학교 동창인 경향신문 박용길 기자는 국방부 담당 출입기자로서 박흥주 대령의 사형집행 현장을 입회했다. 박용길 기자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현장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회기자는 한 명만 허용한다 해서 각 신문사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모여 제비 뽑기를 했는데 내가 뽑혔다.”
6년을 같은 교정에서 뒹굴던 친구가 한 명은 취재기자로 한 명은 대역죄인으로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는 현장에 있었다. 총살집행 사병이 박흥주 대령의 눈을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려 하자 호통을 쳐 물리치고는 정말 아무런 빛깔도 감정도 없는 눈길로 현장에 입회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훑어보았다. 박용길 기자의 얼굴에 시선이 스칠 때 '아, 네가 거기 서 있구나' 하는 눈짓이 있을 법도 한데, 그 눈길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갔다.
사형집행관이 마지막 남길 말을 묻자 그는 조국의 앞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기도를 하고 헌병들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대한민국 만세” “육군 만세”를 외쳤다 한다.
박흥주 대령은 포천에 있는 교회묘지에 묻혔다. 기독교 신자인 박흥주 대령은 두 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도 “주일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 하라.”고 당부했다.
조선시대, 권력투쟁에서 밀리면 대역죄인으로 몰려 3족을 멸하던 시대에도 세월이 지나면 사면복권 시켜주고 벼슬도 추증해 주었는데 박흥주 대령은 언제나 사면복권 되려나?

기사 등록일: 20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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