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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가나안_2
글 : 양재설 (캘거리 근교 Morrin 거주)

梁 在 萬(양재만)이가 아니고 양 재설(梁在卨) 이니까 다시 책상 위에 내려 놓으려고 하였다. (그때 서류를 작성할 때 한글과 한문으로 쓰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구 너머로 소리쳤다.
“여보세요 양재만이나 양재설이나 비슷한데 좋은 자리에 있을때 좀 봐주시지요.” 했더니 그 사람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 “당신 오늘 운수 좋은 날인줄 아쇼.”
이렇게 해서 다음 주에 와도 될지 안될지 그때 가봐야 안다던 그 서류를 단 10분도 안돼서 발급을 해 주었다. 필요한 모든 수속 절차를 다 끝내고 드디어 1968년 4월 4일, 김포공항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JAL기 였다. JAL기로 일본 하네다 공항까지 가고 하루 쉬었다가 다음날 저녁에 CPA편으로 캐나다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다. 부모님과 가족들, 가까운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JAL기에 탑승한지 불과 한 시간 반만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관원은 일본어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영어로 말씀하십시요.” 했더니 나의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또 일본말로 질문을 했다. 여기는 국제 공항이고 나는 외국인이니 국제 통용어인 영어로 말하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밀려나와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는데 우리 때문에 교통이 차단되고 말았다. 세관원이 우리보고 옆으로 비켜서라고 하고 뒤에 서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말로 질문을 하고 통과 시켰다. 내뒤에 섰던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유창한 일본말로 대답하고 통과하는 것을 나는 옆에서서 똑똑히 보았다.
8.15해방 전 한국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못하게 하고 일본말만 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한국말을 하는 학생은 선생님에게 일러서 벌을 받도록 하였다. 이 세관원은 아직도 8.15 해방전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는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아니 이 세관원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대부분이 아직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일본 세관원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는 물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드나드는 한국인 자신들 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한국인으로서 일본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이 서민이 아니고 상류급에 속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일 터인데 만일 이 사람들만이라도 일본말로 대답하지 않고 세관원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그들로 하여금 영어를 사용하던가 한국말을 사용하도록 했다면 독도와 같은 문제도 빨리 해결되었고 오늘날과 같이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와 같은 것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모든 사람들이 세관을 통관해서 다 나가니 그 넓은 곳에 우리 가족 세 식구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세관원은 어쩔수 없었는지 짜증스런 태도로 나에게 영어로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깜짝놀랐다. 그가 영어로 말하기 전에는 혹시 이 세관원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인가 의심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질문에 영어로 대답하고 간단한 짐조사를 당한뒤 세관을 통과 했는데 세관원은 이때부터 미스 조를 부르기 시작했다.
미스 조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우리 보고 한쪽에 있는 빈 방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방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방인지 모르고 있지만 어찌 되었던지 우리는 잠시 감금되어 있는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일본 공항에서 감금되어 있으니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언제고 미스 조라는 아가씨가 나타나면 불평을 하리라 생각 하였다. 미스 조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조씨 성을 가진 한국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국 사람이라면 나의 심정을 털어놔도 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미스 조를 만나뒤 곧 알게 되었다.
미스 조는 약 한시간 가량 기다린 후에 나타났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세관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말하려 했다. 미스 조는 이미 우리의 일을 다 알고 온 듯 나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오히려 짜증스런 태도로 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본말로 대답하고 순조롭게 통과하지 않고 일을 만들어서 바쁜 사람 왔다 갔다 하게 하고 이게 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여자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싶어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미스 조가 한 일은 우리를 비행장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까지 안내해 주고 택시를 태워서 미리 예약된 프린스 호텔로 보내준 일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동경 구경을 하기로 하고 버스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프린스 호텔에서 동경까지 약 40분 걸린것으로 기억된다. 버스 안에서 내다본 일본 풍경은 한국에는 없다 시피한 아파트 건물이 눈에 많이 띄었고 베란다 난간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눈에 거슬렸다. 우리는 동경 중심가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였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각 빌딩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서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생동감이 있고 활기차게 보였다. 서울 거리에 비해 은행간판이 많이 보였다. 은행이 많다는 것은 그에 비례하여 돈의 유통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짐작 할수 있었다. 또 번화한 길 모퉁이 마다 중년 부인네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아들뻘 되는 젊은이들의 구두를 닦아 주면서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다음은 컬러 텔레비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투숙하고 있던 프린스 호텔은 새로 건축된 건물 같았는데 현대식으로 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이 호텔방에서 컬러 텔레비젼을 처음 보았다. 오늘날과 같이 컬러가 선명하지는 않았다.
Calgary에서는 그해 (1968년) 10월이 되어서야 상점에서 컬러 텔레비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일본이 한국보다 30년 내지는 50년은 앞서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그러한 계산이 된것인지는 몰라도 어찌되었던지 짧은 이틀간의 경험으로도 한국보다는 발전된 나라라고 느낄 수 있었다.

2. 캐나다에서
1968년 4월 5일 저녁 9:40분에 CPA편으로 하네다 공항을 떠나면서 내 마음은 인생의 새로운 도전으로 부풀은 마음과 미지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면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찹찹한 심정이 었다.
나는 기내에서 기도하면서 창세기 12장에 있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호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되었다.
다음날 오전 11시 30분경에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였다. 하루밤을 지났는데도 캐나다는 여전히 4월 5일 이었다. 세관을 통과한 후 오후 1시 15분에 출발하는 Air Canada편으로 Calgary에 도착하니 오후 4시 경이었다.
4월 5일 인데도 이곳엔 눈보라가 날리였고 꽤 춥게 느껴 졌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 경제 협조처(USOM)에 근무하는 친지로부터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서 정착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거처를 구할 때까지 임시로 있을 곳은 YMCA호텔에 유숙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YMCA호텔이 가장 싼 호텔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Macdonald성씨를 갖은 사람 하고는 절대로 이해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원래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굉장히 짠 사람들이라 그들과 상대해서 이익이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집사람과 젖먹이 아들(석이)을 Lethbridge 처남댁에 놔두고 나는 캘거리 다운타운에 있는 YMCA호텔 (지금은 없어졌음)에 있으면서 싼 셋방을 구하기로 하였다. 호텔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셋방을 구하는 방법을 물으니 신문을 사서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으라고 하였다. 그 사람 말대로 신문을 사서 찾아보니 가장 싸게 나온것이 월 45불짜리이고 그 다음은 75불이였다.
다른 집들은 150불 내지 250불 하였다. 한국 정부에서 우리 가족이 이민하는데 지참할 수 있게 허락 된 액수는 성인 일인당 200불과 유아 150불을 합해서 550불 정도이었다. 제일 싸게 난 집 두 집을 종이 쪽지에 주소와 전화 번호를 적고 버스를 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걸어서 찾아 가기로 했다.
첫번째로 제일 싸게 나온 집은 36st. Macleod Tr. 남쪽 근방이었다. 지도를 펴서 보니 내가 투숙하고 있는 YMCA 호텔에서 별로 먼 거리 같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걸어가 보니 꽤 멀게 느껴졌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0/2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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