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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근의 기자수첩 ) 에드먼턴 이야기(2)
에드먼턴 시청 
앨버타의 두 도시
1905년 앨버타가 주로 승격된 후 약 15년 동안 자유당(앨버타 자유당)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에드먼턴은 임시 주도였으나 1907년 정식으로 주도가 되면서 앨버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자유당은 공공 인프라 확장과 농업 및 교육 발전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것이 에드먼턴 발전과 맞아 떨어졌다. 에드먼턴은 북미 대륙에서 위도상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대도시로 골드 러시 시대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모험가들이 유콘을 향해 출발하는 출발지가 되었다.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이 에드먼턴으로 이주하면서 에드먼턴은 자유당 지지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그 당시에는 캘거리에서도 일부가 자유당을 지지했지만 농업, 상업 중심의 캘거리는 곧 보수화 되었다. 캘거리는 자유당에 이어 정권을 잡은 U.F.A.(United Farmers Alberta)를 지지했다. 정부 상대로 로비 그룹으로 출발한 U.F.A.는 자유당을 대신해1921-1935년 정권을 잡았고 연방 하원에도 진출했다. 지금은 정치를 벗어나 농가에 물품 공급을 맡고 있다.

그 후 캘거리는 농업 및 상업 중심지에서 원유, 가스 산업의 중심지로 거대 원유 산업 본사가 자리 잡으며 경제적으로 더욱 보수화 된 반면 에드먼턴은 공공부분(정부, 의료, 교육)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사회적 이슈에 좀더 개방적이다.
이런 정치, 경제 사회적 스펙트럼은 계속 이어져 캘거리는 보수세가 강한 반면 에드먼턴은 지유당, NDP 지지세가 강하다. 최근에는 NDP가 더 강세를 보이지만.
앨버타 초기의 두 도시 이런 성격이 고착화되어 지금도 에드먼턴은 캘거리보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진보적 색채가 짙다.
이런 현상은 시장 선거에서도 나타나는데 에드먼턴 시장들을 보면 진보적, 자유주의적 이념을 가진 시장들이 선거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에드먼턴 시장들
에드먼턴은 촌락(Village)를 거쳐 1892년 타운(town)으로 승격되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당시 인구는 700명이었다. 에드먼턴 초대 시장은 매튜 맥카울리(Mattew McCauley)다. 영어의 mayor가 시장인데 타운의 우두머리도 mayor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 한다면 읍장이나 촌장이라고 써야겠지만 편의상 시장이라고 쓴다.

맥카울리 시장은 에드먼턴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교육위원회(School board), 시의회, 경찰제도를 설립해 시 행정의 기초를 세웠다. 교역 위원회(Board of Trade)도 설립했다. 교역위원회는 나중에 에드먼턴 상공회의소가 되었다. 그는 에드먼턴에 병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병원을 설립을 시작했다. 그 병원은 나중에 그레이 넌스(Grey nuns community hospital)의 모태가 되었다. 연방 자유당 도움을 얻어 시내에 전차 시스템을 시작했다.

사스캐추원 강을 건너는 철도를 부설해 에드먼턴-캘거리 철도 건설의 밑바탕을 마련했다. 철도는 1902년 완공되었다. 지금도 올드 스트라스코나에는 캘거리 가는 기차 정거장이 남아 있고 주말에는 올드 스크라스코나에서 자스퍼 에비뉴까지 운행하는 전차가 있다.
맥카울리 시장이 에드먼턴을 위해 많은 업적은 남긴 이면에는 그의 열정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인 연방 자유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에드먼턴이 경제적, 정치적,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파크 이름이 된 시장
필자가 알기로 에드먼턴은 북미 도시 중에서 도시 면적당 가장 많은 파크를 소유하고 있다. 사스캐추원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River valley Park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22배 넓다. 천혜의 녹지는 에드먼턴의 허파로 시민들의 휴식 장소이자 자전거, 낚시, 하이킹, 골프, 크로스 컨츄리 스키로 시민들이 취미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하는 장소다. 도시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파크가 있다는 한가지 만으로도 에드먼턴은 살만한 도시다.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윌리엄 홀레락 파크(William Hawrelak Park)가 있다. 여기서는 해마다 8월 첫 주 시민의 날(Civic Holiday)에 이민자들의 축제인 헤리티지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고 주말에는 BBQ 즐기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겨울에는 파크 트레일이 크로스 컨츄리 스키 코스로 이용되고 Ice Castle로 에드먼턴이 겨울 도시임을 알려주고 있다. 파크는 2년 전부터 전면 보수공사 중이라 현재는 이용할 수 없다.
파크의 이름은 윌리엄 홀레락 시장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3회에 걸쳐 11년 동안 시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시드니 파슨(Sidney Parsons) 시장이 건강 문제로 사임하자 임시 시장이 되었다. 에드먼턴은 파슨 시장의 업적을 기려 99 스트리트 34 에비뉴에서 사우스 커먼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Parsons Road라고 명명했다. 부근의 Parsons industrial도 그의 이름이다. 벽돌공 출신의 파슨 시장은 노동 운동가였다.
자유당에 당적을 둔 사업가 출신인 홀레락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부터 8년간 재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36세의 연부역강한 나이였다. 그 당시에는 에드먼턴 남쪽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도시가 한창 번성할 무렵으로 동물원, 로얄 알렉산드라 병원, 에드먼턴 도서관 본관, 그로트 로드 다리, 포트 에드먼턴 파크 건축이 시작되었다.

홀레락은 그후 1963년-1965년, 1974년-1975년에 두 번 더 시장을 지냈다. 그는 두 번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재임 중 60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기려 1982년 완공된 파크를 그의 이름으로 명명했으나 재임 기간 중 부정과 추문도 잇달았다.

학교 이름이 된 시장, Harry Ainlay 와 Jan Reimer
Harry Ainlay는 에드먼턴 22대 시장으로 1945년-1949년 재임했다. 그는 NDP 전신인 CCF에 적을 둔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에드먼턴 시의원을 지냈고 교육가로서 Queen Alexandar school 교감, Garneau school, Strathcona high school교장을 지냈다. 그는 시장으로 재임시 day light saving tim을 최초로 도입했다. 처음에는 앨버타 주정부에서 도입을 반대했으나 다음 회기에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Harry Ainlay는 주 의원, 연방 하원 의원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교육자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개교한 학교, 화이트머드 드라이브 남쪽 111스트리트에 위치한 학교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Harry Ainlay는 한국 아이들 많은 학교로 알려졌다.

Jan Reimer는 에드먼턴 최초의 여성시장으로 유리천정을 깼다. 재임 기간은 1989년-1995년으로 레이머 시장의 아버지 닐 레이머(Neil Reimer)는 앨버타 NDP 초대 당 대표다.
시장은 소속 정당이 없으나 레이머 시장은 사민주의자로서 시정에도 이를 반영하고자 했다. 그래서 1989년 선거에서 상대방은 “레이머 후보가 시장에 당선된다면 Edmonton은 Redmonton이 될 것이다.”고 공격했다.

이민 온지 30년 이상 되신 분들은 Ed Tel을 기억할 것이다. Edmonton Telephones Corporation으로서 에드먼턴은 전화국을 소유 경영했다. 전기, 전화, 철도, 의료 등은 공공재로서 영리보다는 공익이 우선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상업용 인터넷이 차츰 대중화되면서 통신산업은 규모가 커지고 다양해지고 불확실성은 늘어나 시 재정의 능력을 벗어난 대규모 사업이 되었다. 레이머 시장이 재임하던 1995년 초 Ed Tel을 사설 통신회사 Telus에 매각했다.

앨버타 정부는 이미 1991년 AGT(Alberta Government Telephones)를 Telus에 매각했다.
Telus는 B.C. 주의 BC Tel도 사들여 초대형 통신회사로 발돋움했으니 공공재의 민영화가 이렇게 진행되었다.
1990 초반 상업용 인터넷이 소개되면서 시작된 통신혁명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전화 모뎀에서 5G 휴대전화로 진화되기까지, 512 (MB)메가 바이트 데스크 탑에서 512 (GB)기가 바이트 휴대전화로 진화하기까지 고작 30년 걸렸다.
레이머 시장은 시 의회와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논란이 있던 폐기물 처리를 효과적으로 마무리했고 좌파 시장 답게 비버 가죽으로 만든 의전용 의사 사용을 거부했다. 레이머 시장은 시장직을 물러난 후에도 사회활동을 통해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해 주 총독으로부터 “세기의 에드먼턴 여성” 메달을 받았다.

에드먼턴 공립 교육청은 2017년 에드먼턴 남서쪽 오챠드 지역에 개교한 학교 이름을 Jan Reimer school이라고 명명했고 에드먼턴 시는 2021년 트윌리거 파크와 포트 에드먼턴 파크 중간에 있는 Oleskiw Park를Jan Reimer park로 개명했다. (계속됩니다)



기사 등록일: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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